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말꼬투리 Feb 13. 2024

그렇게 재미있는 일을 하다 어쩌다 이곳에?

그러게요..

왜 하필 보험사였을까?

내가 이직을 결심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가장 크게 작용한 건 솔직히 말해 '돈'이었다.

잡지기자 일을 했던 사람이 돈 타령하는 게 조금은 품위가 떨어질 수 있다.

내가 다녔던 잡지사는 그나마 라이프스타일을 지향하는 곳들이었기 때문에 명품, 럭셔리 등과는 약간에 거리감이 있었다. 하지만 잡지사에 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에는 조금 초연한(듯 보이는) 사람들이다.

잡지기자, 특히 패션지 기자를 꿈꿨던 사람들의 어린 시절을 상상하면 쉽게 이해된다.

우리 때만 해도(85년생) 패션지 기자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패션지는 트렌드 최전방에 있는 매체로, 그야말로 '간지' 철철 넘치는,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 등장할 것 같은 언니들이 일하는 곳이라 여겼으니까!

거기다 용돈을 쪼개 잡지를 사서 볼 정도로 유행에 민감한 친구들은 그래도 집이 넉넉한 측에 속했다.


어디까지나 내가 자라온 환경에 한정된 얘기일 수도 있지만

내가 중고등학교 때 <쎄씨> <키키>라는 잡지를 사서 보는 친구들은 옷 잘 입는 모델들을 스크랩하며 나이키, 아디다스 그 이상의 브랜드를 줄줄 외우곤 했다.

하지만 나는 패션지에 그다지 관심 없었다.

잡지라면 사촌언니 따라 영화지 <스크린>을 사서 보거나 오빠 따라 스포츠지 <루키>를 봤다.

그중 여성지  <주부생활> <여성중앙>등은 사춘기 여학생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잡지 끝부분에 야릇한, 그러니까 섹스와 관련된 글이 그득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난 애초에 패션지 기자를 꿈꾼 적은 없다.

그쪽보다는 방송국 PD, 그중에서도 라디오 PD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1년에 고작 2~3명 뽑는 그 구멍을 통과할 자신이 없었다. 제대로 노력하기도 전에 지레 겁먹고 우회한 길이 패션지 기자였다.

때마침 잡지사 공고모집을 봤고 그렇게 입사했다.

향유하는 문화라고는 영화, 책, 드라마, 가요 정도였는데, 함께 입사한 동기언니는 여기에 얹어 뮤지컬, 연극, 전시는 물론이고, 미식에도 관심이 많았다. 언니는 내가 어렸을 때 봤던, 패션지 보는 걸 즐기는 친구들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돈과 상관없이 다양한 문화 생활을 즐기고, 그 안에서 취향을 갖게 된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야 말로 패션지 기자, 그중에서도 피처기자가 갖춰야 할 미덕이라 생각했다.

처음부터 애정이 없었던 일이니,

조금 하다가 다시 방송국 입사를 도전할거라 생각했다. 하지망 이게 웬걸. 나는 그 세계에(?) 블랙홀처럼 빠져 들었다.

그땐 몰랐는데 아마도 나는 제법 잡지 일에 점점 재미를 느꼈던 것 같다.

내 이름 세글자가 적혀 있는 글이 잡지 안 어딘가에 콕콕 박혀 있었고, 내가 원하는 그림을 그려낼 수 있었다. 가장 먼저 신생 맛집을 가고, 가장 먼저 신작 영화, 책 등을 접할 수 있었다.

특히, 기자의 신분으로 연예인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어울리는 이미지를 찾아 촬영하며 1시간 남짓 인터뷰를 빙자한,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건 꽤나 즐거웠다.

잡지사에 다니며 목표 하나를 정했다. 언젠가 내가 해외 화보 촬영 판을 벌여 봐야지. 그리고 어느덧 나는 그런 촬영을 몇 번 해낸 연차가 됐다.


2010년에 입사해 2021년, 12년 차가 됐다.

잡지사는 내가 입사한 이후로 줄곧 사양산업의 대표로 꼽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명 연예인을 섭외하고, 그들을 앞세워 돈을 벌어야 한다는 회사의 압박은 계속됐다. 패션, 뷰티 브랜드들은 잡지에 광고는 싣지 않더라고 셀럽들의 모델비에는 후했다. 덕분에 연예인들의 헤어를 만지고 메이크업을 해주며, 옷을 입혀주는 이들도 많은 수익을 거뒀다. 포토그래퍼, 영상감독은 말할 것도 없었다. 판은 내가 벌였는데 정작 돈을 버는건 나 빼고 모두였다. 박탈감이 들었다.

초심을 잃은 것이다. 애초에 나는 돈 버는 것으로 직업을 삼은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10년 넘게 일했지만 내가 모아놓은 돈은 1억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좀 많이 서글펐다.

사람들은 아니, 회사는 재미있는 일을 하는 대신 박봉을 받는 건 당연한 듯 여겼다. 괘씸했다. 이렇게 앞으로 몇 년을 더 일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변화가 필요했다.

때마침 코로나가 터져 재택근무 하는 날이 많아지면서나는 본격적으로 이직을 준비했다.

일하면서 재미는 다 느꼈으니 이제는 돈이다.

내 이직의 목표는 심플했다.

어느 회사를 가나 일은 힘들거고, 사람들에게 상처는 받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 겪고 싶었다.


그러다 눈에 띈 채용공고가 oo생명 콘텐츠 기획자였다.

10년 넘는 시간 동안 내가 하던 일이 일반 회사에서도 과연 쓸모가 있을지 궁금했고 자신도 있었다.

다행히 당시 내가 가지고 있던 포트폴리오에는 재테크나 경제 관련한 콘텐츠가 있었고, 보험에 대해선 '무지랭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럴듯하게 잘 포장했다. 그리고 난 oo생명 콘텐츠 기획자로 입사했다.


입사한 첫날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이 나의 이력을 알고 가장 먼저 묻는 건

왜 이 회사에 왔어요?

그렇게 재미있는 일 하다가 여기에서 일하는 거 재미없죠?  다.


그러면 난 한결 같이 답했다.

내가 이 회사에 온 건 일에서 재미를 느끼려고 한 게 아니에요. 잡지사는 워낙 박봉인 곳도 많고.. 그리고 6시면 퇴근하잖아요. 퇴근하고 할 수 있는 일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어요


지금도 이 질문을 받으면 똑같이 답하냐고?

그렇지 않다. 어쩌면 앞으로 내가 써내려갈 글의 주제가 될 대답을 한다.

"내가 이 회사에 온 건 그동안 몰랐던 세상을 배우기 위함인 것 같아요. 내 연봉도, 내 시간도 찾았지만 이제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걸 배우고 있어요. 그게 뭐냐면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