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복, 슬리퍼는 둘째치고
보험사는 보수적이다.
일의 성격 때문인지 직원들이 다른 사람을 대할 때도 굉장히 조심스럽고, 예의 바르다.
나쁘게 말하면 조금 답답하다. 흔히 지킬게 많을수록 보수화 된다고 하는데, 그 말 그대로인 듯 하다.
보험사뿐 아니라 소위 말하는 대기업은 최대한 책잡히지 않게 회사를 운영한다.
보는 사람들이 많기도 하고, 트집 잡혔다가 손해 보는 금액이 상상초월일테니 말이다.
보험사는 영업직의 사람들이 다수인 곳이다.
그러다 보니 대외적으로 사람들을 만날 일이 많다. 언제, 어디에서든 미팅 할 준비를 해야 하고, 그러려면 무난한 옷을 입는 게 안전하다. 보험사 직원들에게 옷은 말 그대로 전투복인 셈이다.
잡지사에서 일하다가 보험사로 이직한다고 했을 때 내 주변에서 가장 우려했던 건 내가 분명 그
조직 문화를 답답해 할 것이라는거였다.
하지만
세상에 내 입맛에 맞는 회사는 없다.
정시출근 정시퇴근을 하는 회사이니, 그 정도의 불편함이나 비자율적인 면들은 받아들이며 그 룰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난 그런 준비가 돼 있다 자신했다.
내가 다니는 직장에 따라 나를 바꾸는 건 자영업자가 아닌 이상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대학생 인턴시절이었다. 당시 언론고시생들이 가장 가고 싶은 방송사 1위로 꼽혔던 MBC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학생 인턴을 뽑았다. 딱 3명 뽑히는 예능 PD인턴에 나는 덜컥 합격했다.
어렸을 때부터 동경했던 그 직업, 그 회사에 (임시) 사원증을 찍고 건물에 들어서는 것에 나는 들떠있었다. 내가 뭐라도 된 것인 양 가슴 벅찼다.
하지만 고작 3개월짜리 단기 인턴대학생들에게 현직 PD들이 뭘 맡길 수 있겠나?
그냥 촬영장에서 깔짝대고, 편집하는 조연출들 옆에서 자막 쓰는 거 구경하고, 종편실에 가서 완성된 프로그램이 최종적으로 어떻게 방송되는지를 따라가는 수준으로, 그저 PD를 지망하는 대학생이었다.
당시에 MBC 예능은 최고였다. 특히 <무한도전>의 시청률과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었다.
아쉽게도 내가 <무한도전> 팀에 소속된 적은 없었지만 그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는 김태호 PD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를 두고 하는 말은 일관됐다.
얄미울 정도로 잘하고, 열심히 한다. 그의 성공은 당연한 것이다.
선후배 PD들이 입을 모아 그를 칭찬했다.
평판관리를 잘한 덕도 있겠지만, 그게 단순히 사내정치를 잘해서 나온 얘기들일까?
당시엔 그분의 패션스타일도 화제가 됐는데, 그도 그럴 것이 방송사도 잡지사 못지않게 직원들이 자유롭게 옷을 입고 다녔지만 어디까지나 청바지, 후드 수준이었던 듯 하다. 하지만 그분은 탈색과 귀고리 등 화려한 액세서리를 즐기는 연출가였다.
그런 그분의 입사시절 면접관이었던 분의 이야기를 건너 건너 들었다.
최종면접전이었던가, 입사원서 사진이었던가, 노랗게 머리를 염색하고 귀고리 한 모습을 보고 순간 인사팀은 그가 상X라이가 아닌가 걱정했다고. 아무리 자율적으로 다니는 사람이 많은 방송사지만, 독특하고 특이한 것만을 추구하기엔 회사는 회사이고, 조직은 조직이니까.
게다가 방송사는 가장 대중적인 콘텐츠를 만드는 곳이니, 지나치게 자기 색깔이 뚜렷한 사람은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우려와 달리 김태호 피디는 최종면접 때 제대로 갖춰 입고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났고, 당시 사장님과 인사팀은 그가 걱정할 만큼의 X라이는 아니겠구나 싶어서 뽑았다고 한다.
나는 그 전까지 창의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의 편안하고 자유로운 모습만이 멋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TPO에 맞게 자신을 보여주는 것이야 말로 내가 추구해야 할 방향이었다. 자기 개성응 드러내지만, 조직생활을 하는 데 있어 적절히 그 안에서 어울릴 수 있는, 유연한 사람. 나에게 멋은 고집보다는 유연함에 가까운 것이었다. 나를 잃지 않으며 세상과 융합하는 것.
그 마음으로 내내 직장생활을 했고, 그 조직문화가 싫다면 개인이 떠나는 것만이 답이라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그러니 내가 보험사로 이직을 할 땐, 때마다 신었던 쪼리, 슬리퍼, 반바지, 후드티, 청바지 등을 입는 일은 없다는 것쯤은 억울하지 않았다.
하지만 출근 첫날부터 나는 너무 튀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옷 중 가장 무난한 블랙 스커트에 화이트 셔츠를 입었는데 하필 그 블랙스커트 페이크레더 재질이었던 것. 이후부터 나는 회식자리에서 꽤 자주 언급됐다.
'출근 첫날 가죽 치마를 입고 온 애'
어떤 날은 내가 입은 롱부츠를 보고 동공이 커지는 동료가 있었고, 노란 남방을 보며 '노랑이'리고 놀리는 동료도 있었다. 사실 이 정도 복장은 잡자사에서는 눈길조차 잡지 못하는데..
때때로 마음속에 반발심은 일어났지만 늘 무채색 계열의 옷만 입는 그들의 눈엔 내가 그렇게 튀어 보일 수 있다고 되뇌었다. 문제는 잡지사 다니면서 때마다 샀던 SPA브랜드의 옷들과 핏과 컬러가 다른 청바지들을 주말에만 입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금요일은 일명 캐주얼 데이라고 해서 전 직원이 자율복장을 입어도 된다. 그래서일까. 금요일은 무조건 무슨 일이 있어도, 청바지를 입는다. 잡지사 다닐 때만 해도 나는 기분에 따라 옷을 입었다. 옷은 내 기분을 전환시켜 주는 치트키였다. 그런데 지금은 옷이 그 역할을 해주고 있진 못하다.
그 대신 칼퇴 후 저녁을 손수 차려 먹고, 고양이가 놀아주는 것으로 기분 전환하는 방법을 바꿨다.
패션지를 다니는 사람으로서 어느 정도 패션에 대한 센스와 관심을 갖는 게 당연하듯,
보험사를 다니는 사람에겐 패션은 타인에 대한 매너일 뿐이다.
소속이 달라졌으니 옷을 대하는 나도 달라졌다.
여전히 나는 구두가 낯설어 슬랙스에 에어맥스 94, 뉴발란스 992를 신고,
소위 말하는 핸드백이 어색해 백팩을 메고 회사를 간다.
금요일이 아닌 평일에도 청바지를 입고 싶을 때도 있지만 꾹 참는다.
그럴 땐 누가 하라고 하면 하기 싫고, 하지 말라고 하면 하고 싶은 청개구리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다독인다. 이번주 금요일엔 반드시 청바지에 맨투맨 티를 입겠다고 다짐하며!
회사원들의 옷이 단조로울 수밖에 없는 이유도 덕분에 알았다.
교복처럼 같은 옷을 입는 건, 그 외에 옷들은 어차피 입을 수 없고, 입을 필요가 없기 때문.
덕분에 매달 새로운 옷을 사 입기에 바쁜 내 쇼핑목록이 꽤 많이 단출해졌다.
이 회사에 오기 전까지 나는 모두가 신발 50켤레 이상은 있고, 작은 방 하나를 가득 채울 정도로 옷이 있는 줄 알았다. 매달 옷 쇼핑을 하는 것도 당연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생각보다 패션에 민감하지 않다.
관심도 없다. 그리고 어떻게 입든 내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나는 그걸 이제야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