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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꼬투리 Mar 24. 2024

정체성 혼란의 시작

아보카도가 슈퍼푸드로 보이는 순간까지

내가 언제 글을 쓰고, 콘텐츠를 기획했던 사람인가 싶은 순간이 있다.

원래 내가 했던 일과 너무 동떨어진 일을 하고 있다 느낄 때.

보험사로 이직한다고 했을 때, 그동안 내가 했던 일들이 어떻게 활용이 되고, 나의 쓸모가 어디까지 미치게 될지 궁금했다고 하지만 사실은 큰 기대는 없었다.

잡지사는 잡지를 통해 수익을 얻는 곳이다. 그러다 보니 내가 이 회사를 먹여 살린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같은 이치로 보험사는 보험 상품을 판매하는 영업직군들의 사람들이 주류다. 그들이 우리를 먹여 살린다는 것에 반박할 사람은 없다. 그들의 서브 역할 정도만 하는 콘텐츠가 중요해봤자 얼마나 중요하겠나?

솔직히 톡 까놓고 말해, 나는 격무에 지쳤고 메인이 아닌 사이드에서 책임을 좀 덜며 일하고 싶었다.

그래서 입사 1~2년 간 널널한 업무 강도 덕에 이직 잘했다는 만족감이 컸다. 워라밸을 지키면서 내가 벌었던 월급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이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었다.

본격적으로 위기가 찾아온 건, 3년 차에 들어서였다. 나를 채용한 팀장님이 갑작스레 임원 계약 연장이 불발됐고, 하루아침에 그분의 자리는 공석이 됐다.

대충격이었다.

10년 넘게 다녔던 회사의 상사들이 이렇게 아무 예고 없이 ‘사라진’ 경우는 처음이었다. 대부분 회사가 분위기를 조성하고, 그 분위기를 느끼고 자발적으로 사직서를 내면 몰라도 회사가 대놓고 통보하는 일은 겪어보지 못했다.

아무리 임원이라고 해도, 팀원들과 헤어질 시간은 줬다. 적어도 이별의 유예 기간은 줬다.

난 한동안 얼이 빠졌다.

사내 메신저에 떠 있는 그분의 오프라인 표시도, 텅 비어 있는 그분의 자리도, 좀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는 파트장님들의 어수선한 분위기도.. 낯설고 허전했다.

그런 내 기분을 감지했는지 옆자리 과장님이 한마디 했다.

“좀 기분 이상하죠? 저도 처음엔 되게 그랬어요. 근데 몇 번 겪으면 또 괜찮아져요. 좀 잔인하지만 임원이라는 자리가 참 그래요”

아무리 상사와 허심탄회하게 얘기하며 잘 지내는 사람이더라도 이 분위기에서 먼저 연락하는 건 힘들었다.  어줍지 않게 위로를 하기엔 나는 과장 나부랭이에 불과했으니까.

슬퍼하고 서운해하는 시간도 잠시, 나는 내 앞가림을 해야 했다.

결국 이 회사에서 나의 업무에 대해 이해도가 (그나마) 높은 분이 사라졌다.

내 살길을 마련하기 위해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릴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팀이 재정비되는 동안 나는 아무 얼 없이 1~2달을 보내야 했다. 월급루팡의 시즌이었다.

회사에서 일이 없어서 괴롭다는 말을 내 입으로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사람들은 일 안 하고 월급을 받는 건 너무 좋은 일 아니냐고, 이 상황을 즐기라고 했다.

“그러기엔 회사에서 머무는 시간이 너무 길어. 또 난 그렇게만 시간을 때우기엔 양심도 있고, 꽤 성실한 걸?”

자기 효능감이 바닥을 쳤다. 사실은 이 회사에서 알아서 내가 떠나길 바라는 게 아닐까, 팀원들이 ‘쟤는 뭐 하려고 이 회사에 있는 거지?’라고 묻는 듯했다.

팀이 정비되면서 팀 내 가장 높은 직급을 가진 분이 새로운 팀장이 무심결에 책상에 올려놓은 아보카도 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게 됐다. 그 까닭은 새로운 팀장이 보낸 단체 문자 때문이었다.

-       책상 위에 여러분의 이미지와 잘 맞는 과일 하나씩 올려놨어요.  선물 받은 과일 바구니에 있던 거니 잘 챙겨 먹으세요

그때 나에게 아보카도는 고급 건강 식재료, 숲 속의 버터, 슈퍼푸드가 아닌 울퉁불퉁 딱딱하고 못 생긴 아보카도였다.

친한 친구에게 말하니, 아무래도 내 정신이 온전치 않으니 새로운 팀장에게 제대로 된 업무를 받으라는 말을 들었다.

새로운 팀장은 회사에서 유명한 보고서의 신이자, 워커홀릭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스페셜리스트르 입사한 걸 알지만, 지금 J과장에게 맡길 일은 그런 성격이 전혀 아닐 수 있어 조심스러워. 하지만 꼭 J과장이 맡아줬으면 좋겠어”

그렇게 나는 글 쓰던 나의 정체성과 조금 먼 일을 하고 있다.

새로운 경력의 시작일까, 누구 말대로 경력 단절일까?

다행인 건 지금은 그래도 아보카도는 아보카도로만 보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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