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신경 종양이 뇌종양이라고요?
병 자체보다 병명과 가능성이 주는 두려움
"365일 중에 2/3은 아프다고 하는 것 같다." 신랑이 자주 하는 말이다. 그 말에 반박을 할 수 없었던 나는 "그래도 큰 병은 없다. 자주 아픈 사람들은 내 몸에 그만큼 예민하다는 거니까 큰 병을 안 만들지!" 라며 입술을 삐죽였다. 나는 자주 두통과 감기에 시달렸고, 그 외의 질병에도 취약했다. 내 몸의 조그마한 신호를 무시하고 약을 제때 먹지 않음면 약을 먹어도 소용없이 끙끙 앓는 시간이 길었기에 나는 내 몸에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독이 되었는지 실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신경외과 의사 소견으로 '이 정도 크기면 아무 이상 없이 지내는 사람들이 있음'에도 나의 귀는 돌발성 난청을 경험했다. 그리고 청력을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너무 신기한 것이 돌발성 난청으로 알고 있을 때에는 소리가 잘 안 들리고 어지럼증과 메스꺼움이 주 증상이었지만 크게 힘들다고 느끼지는 않았다. 하지만 청신경종양을 알게 되고 집으로 오자 어지럼증은 배가 되었다. 내 머리는 가로와 세로 교차로 돌았다. 그와 동시에 귀도 타원형을 그리며 돌고 있음을 느꼈다. 메스꺼움은 더 늘어났고, 밥을 먹고 약을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침대에 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오전에 한번, 오후에 한번 나는 움직이다가 갑자기 온몸에 힘이 빠지며 스르르 누웠다.
가족이 옆에서 보았을 땐 더욱 심하게 느꼈다. 함께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실시간으로 눈으로 영혼이 나가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고 한다. 컨디션이 오늘과 내일이 다른 것처럼 오늘도 분 단위로 달라졌다. 아이들을 돌보아 주기 위해 함께 지냈던 엄마는 딸의 모습에 딸 앞에서는 씩씩하게 지냈지만 딸이 없을 때는 속상하여 몰래 혼자 울었다. 그 소리를 들으며 나도 몰래 울었다. 엄마 앞에서는 울 수가 없었다. 내가 무너지면 엄마도 무너지는 것을 알았듯 엄마도 엄마가 무너지면 딸이 무너진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우리 모녀는 서로에게 기대어 쓰러지지 않게 버텼다.
뇌종양의 일종인 청신경종양은 다른 뇌종양들에 비하여 '착한 종양'으로 불린다. 이 세상에 착한 종양이 어디 있겠냐만은 다른 뇌종양들에 비하여 생명에 지장이 없는 양성 종양이며 방사선치료나 개두수술을 하더라도 위치가 뇌 안쪽이 아니기에 예후가 좋기 때문이다. 그것 만으로도 어딘가, 죽지 않는 것이 어디인가, 나의 생활만 좀 불편한 것이 어디인가 마음을 다독였지만, '착한 종양'이기에 쉽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도 받았다. '이 정도 장애쯤은 괜찮지 않은가'라는 말투로 내가 겪을 수 있는 부작용이 내 것이 될 확률이 높다는 이야기를 아주 덤덤하게 이야기하지만 나는 덤덤하게 들을 수 없었다. 누구든 내 손톱 밑의 가시가 가장 아픈 법이니 말이다.
청신경종양은 귓속에서 종양이 생겨 청신경을 쫓아다니듯 자라난다. 그렇기에 가장 약한 청신경에서 반응이 일어나 청력저하가 생긴다. 그 이후에는 붙어있는 전정신경과 안면신경에도 영향을 준다. 그 당시 외래진료를 받았던 의사는 전정신경이 아직 살아있어서 어지럼증을 느끼는 것이기에 전정신경이 죽으면 어지럼증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종양이 좀 더 커져 안면신경도 누르게 된다면 안면마비 증상을 일으킨다는 말도 함께 하였다. 그렇다고 치료 요법을 하면 청각장애, 안면마비, 한쪽 다리 절기 등의 부작용을 겪을 수 있기에 굳이 지금 조금 덜 들리고 어지러운 것으로 치료를 하기에는 내가 너무 젊기에 추천하지 않았다. 종양을 잡다가 부작용을 겪으면 인생이 더 힘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30대에 귀가 들리지 않는 것과 60대에 귀가 들리지 않는 것은 아주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나는 이제 8,7살 엄마이다. 내가 안면마비가 오고 한쪽 다리를 절게 된다면 내가 아닌 내 아이들이 힘들어지는 것은 눈에 보듯 뻔하였다. 지금껏 자랑스러운 엄마는 아니었지만, 나 때문에 아이들이 놀림을 받는다고 생각한다면 차라리 없는 엄마가 낫지 않을까 자꾸 극단적인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장애이해교육을 하는 교사이며 장애에 편견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나의 장애에는 편견이 있었던 부조리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