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릇처럼 잘못된 이유를 알고 싶어 진다.
왜 과거를 돌아보며 지금의 원인을 찾으려고 하는 것일까?
"왜 나는 이렇게 아프게 되었을까?" 돌발성 난청이 처음 발병하였을 때부터 청신경 종양으로 누워 있는 내내 내 머릿속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왜?' 일 것이다. 그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내가 왜 이 병에 걸렸는지 그 이유를 나에게서 찾고 싶었다. 3월 내내 밥도 못 먹고 잠도 잘 못 자고 일만 했던 것이 문제였던 것일까? 갑자기 안 하던 유산소 운동을 1시간씩 해서 그런가? 미라클 모닝을 5시에서 4시로 당겨서? 특수 유아를 안고 내내 씨름하다가 이렇게 된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이번 2월부터 진행한 이사를 반포장도 아닌 그냥 맨몸으로 신랑과 나 단 둘이 했기 때문이었나? 아이 초등학교 입학 후 괴롭히는 친구 때문에 신경을 너무 많이 쓴 것인가? 아니면.... 그 모든 것을 다 같이 했기 때문이었나...?
침대에서만 누워 있는 내 상황에서 도저히 미래는 그려지지 않았다. 일말의 희망도 없었다. 복직이 코 앞으로 다가왔음에도 내가 출근을 할 수 있을지 가늠조차 하지 못하였다. 나는 그렇게 내 안의 세계에 갇히고 말았다. 내 안의 세계에서는 "다들 이 정도는 모두 하잖아. 왜 하필 나야.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나는 나름 건강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란 말이야."라는 외침이 한가득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일이 원인과 결과가 명확히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나는 이 일의 인과관계를 무의식적으로 찾으려 애를 썼다.
그렇게 인과관계를 찾기 위한 노력으로 하루 대부분을 투병일기에 관한 글과 책을 읽고 필사하였다. '아! 이 작가는 루프스를 겪고 있구나. 그런데 나와 비슷하네. 완벽주의! 역시 완벽주의가 내 병을 만든 것인가?", "아! 이분은 파킨슨 병을 겪고 있으시구나. 이분은 미국에서 정신과 의사로 일할 정도라면 나보다 더 열심히 사셨겠다."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좀 억울했다. 이분들에 비하면 나는 아주아주 평범한 일상을 살았을 뿐인데 내가 왜 '뇌종양'이라는 단어도 무서운 병에 걸려야 하는지 말이다. 그리고 내 에너지는 하루 30분 산책으로 모두 다 써버리게 되었는지 한탄하였다. 아주 어리석게 말이다.
원인과 이유를 찾는 것에서 벗어나니 나에게 일어난 일의 의미를 찾아보게 되었다. 나를 비극적 주인공이나 순교자로 만드는 것이다. 이 병은 나의 고난이라는 생각하는 것이다. 나름대로 내게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믿어본다. 그렇게라도 해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부당하고 불합리한 병이었다. 이것을 수긍하고 인내하는 것이 나의 미션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의 평화가 왔다. 하지만 이 일은 우연히 작동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나는 운이 나빴을 뿐이었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의 목적이 나만의 비참한 비극이 평범한 불행이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나를 특별한 비극의 주인공이 아니라 평범한 일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책을 더 많이 읽으면 읽을수록 다양한 병은 내 옆에 와 있는 것 같았다. 그 누구도 병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었다. 아주 작은 감기부터 생명을 앗아가는 병까지 말이다. 그렇게 마음먹고 나니 나의 병은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만들어 주는 매개체가 아닌 그저 일상의 평범한 일 중 하나일 뿐이었다. 단지 치료가 좀 복잡하고 회복이 더딘 병 중의 하나. 그뿐이었다. 어떻게든 의미를 찾아보려 노력하였지만, 아무 인과관계도 의미도 없었다. 어치피 처음부터 답이 나오지 않는 해결 불가능한 문제였다.
이제는 힘든 일을 경험하고 그 과정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깔끔한 진단과 완벽한 솔루션은 애초부터 없었다. 그 대신 대응과 수용가능한 현실적인 실천 방향만 있었을 뿐이었다. 이제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해 본다. 과거가 아닌 현재에 포커스를 두고자 하는 것이다. 오늘 하루의 작은 즐거움과 1%의 성취부터 해보고자 한다. 이렇게 지내다 보면 내일은 오늘보다 괜찮아질 것이라는 기대가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