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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티 Nov 08. 2021

조금 더 단단한 내 삶을 위하여

-프랭클 고통에 의미 부여하기-

아픔, 질병, 상처, 상해 이런 단어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특별하게 운이 좋은 사람에게 고통은 가끔 겪는 실연이나 가끔 겪는 감기 같은 사소한 질병일 수도 있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장애를 남기는 질병이나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사람도 많고 많다. 저마다 고통의 이유는 다르겠지만 그 누구도 나를 이해할 수 없듯이 내가 아닌 타인에 감정에 공감하고 함께 고통의 눈물을 흘린다는 말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이가 아플 때 부모는 차라리 내가 대신 아플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여기지만, 고통은 바다에 홀로 떠있는 돛단배만큼이나 그 파도와 비바람을 혼자 겪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반대로 고통이 크기가 너무 크고, 내가 감당할  없다면  삶의 주인이라고 말하는 내가 고통을 끝낼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도스토옙스키는 "인간은 무엇에든 익숙해질  있는 존재"라고 말한다. 신기한 일이다. 어제는 분명 손발이 저리고, 어깨를 무겁게 하고 가슴에 숨이 턱턱 막히게   느낌이 오늘은  그럭저럭 살만하다는 느낌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바늘로 찌르는 듯한 편두통도 뜨거운 물에 데어 따끔한 쓰라림도  먹고 자고 나면 죽을  같지는 않고, 살만해진다. 없으면    같은 사람도  빈자리가 여전히 허전하지만, 흔한 노랫가사처럼 '보통날' 돼버린다.


내가 겪었던 고통은 그렇게 크지 않았는데 괜한 호들갑이었을까? 알코올에 찌든 간처럼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로 바뀌었을까? 아니면 시간이라는 약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것일까?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낸 사람과 경제적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 실연을 당한 사람 누구의 고통이 더 큰지 숫자라는 것으로 측정이 가능할까?

그 크기는 다르겠지만 모두가 공허함과 외로움 큰 슬픔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가능한 한 빨리 이 고통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고, 새로운 좋은 기억으로 고통을 덮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방향제로 슬픔의 냄새를 가릴 수는 없다.


고통은 영혼을 단련하는 대장장이의 망치처럼 우리를 담금질하고, 그 고통의 결과를 덤덤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삶은 기준과 본보기는 즐겁고 화려한 사람들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화려하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웃음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들은 누구보다 혼자 있고, 우울한 시간을 더 혹독하게 겪었을 가능성이 크다. 웃음의 크기는 울음의 크기가 비례하지 않을까?


누구나에게 삶은 비참하고 고통스럽다. 저마다의 이유로 그 크기는 다르겠지만 내가 나온 군대가 제일 힘들듯이 그 크기는 비교하는 것 또한 무의미하다.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은 거의 어떤 방식의 삶이든 견딜 수 있다. 그렇다면 고통이 크기에 대해 집착하는 것보다, 그 "이유"를 찾는 게 더 중요하다.


숫자가 지배하는 냉혹한 세상에서 누군가에게는 그저 보잘것없는 나라는 개인이 대체 무엇 때문에 고통을 견디면서 하루를 살아야 한다면 언젠가 이 고통이 나의 웃음을 더 크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언젠가 행복한 순간이 온다면 그것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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