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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티 Nov 10. 2021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스토아학파 자신의 반응 선택하기-

내가 기뻐서 웃는 것인지? 웃어서 기쁜 것인지? 그렇다면 기쁘면 웃어야 하고, 슬프면 울어야 하는 것인가? 

아리송한 이 질문만큼이나 복잡하고 답을 낼 수 없는 게 사람의 감정이 아닐까? 오늘 하루 어땠어?라고 묻는 대답에.."그냥"이라고 답한다면 혹은 "좋았어" "별로였어"라고 답한다면 제대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일까?  

복잡한 감정을 몇 글자의 단어로 옮길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그런 확실한 언어가 없다. 지금 순간에도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사람의 감정이라 연속적으로 흐르는 물과 같은 감정을 하나의 단어로 집어낼 수 있을까? 


햄릿에서 "세상에 좋고 나쁜 것은 없지만 생각이 그렇게 만들 뿐"이라는 대사가 있다. 예를 들어, 티브이 속의 드라마를 보고 울거나 웃거나 하지만 사실 소리와 화면을 모아서 커다란 네모난 장막에 비춘 것일 뿐이다. 그 감정을 느끼는 주체는 인간이다. 내가 바라보는 사물과 세상 모두 그 자체로 선하거나 악한 것, 가치 있거나 없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데 이러한 사실에 가치를 입히는 게 나다.


가령, 복도에서 뛰고 계단 난간을 점프하는 학생은 정말 버르장머리가 없는 아이일까? 아니면 두 다리가 건강해서 그저 뛰고 싶었을 뿐일까? 어른이 보는 그 아이는 예의가 없지만, 심지어 그렇게 보는 어른도 어렸을 때는 더 심한 장난을 치지 않았나? 보는 입장이 달라지니, 그 자연스러운 행동이 어느새 옳지 못한 행동으로 바뀐다. 


친구의 생각 없이 뱉은 말이 나에게 상처가 되기도 하고, 나도 누군가에서 툭 던지는 말이 그 사람에게는 상처가 될 수가 있다. 이때 두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과연 그 친구는 나를 엿 먹이려고 그런 얘기를 했을까? 아니면 내가 그렇게 의미부여를 하는 게 아닐까? 반대로 내가 다른 사람에게 던진 말이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상처를 주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세상 자체에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면 주체인 나는 행동하는 방식, 다른 하나는 마음속의 생각에 내가 반응하는 방식으로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타인의 판단과 행동을 포함한 다른 모든 것들은 우리의 통제 범위를 벗어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이점을 깨닫게 되면 바뀔 수 없는 것을 바꾸려고 애쓰는 고통을 벗어날 수 있고 바꿀 수 있는 것에 집중할 수 있다. 스토아 철학은 우리에게 한계를 인식하고 할 수 있는 일에는 주인 의식을 가지라고 말한다.


누군가 실수로 던진 돌에 지나치게 화를 낼 필요도 없다. 나를 화내게 하려고 던진 것이 아니라, 내가 결국 화를 낸 이유를 찾았던 게 불과하니까 말이다. 친구의 말투가 무례하다는 사실은 바꿀 수 없지만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충분히 선택할 수 있다. 


산은 그저 높고, 바다는 언제나 출렁거리고, 비는 올 것이고 해는 뜰 것이다. 비 오니까 기분이 처지고, 햇빛이 좋아서 기분이 상쾌하고, 더우면 기분이 불쾌한 게 아니다. 나의 몸에 반응하는 느낌과 내가 생각하는 사고의 틀 또한 그저 내가 선택했을 뿐이다.


부모는 선택할 수 없지만, 나의 감정과 반응을 충분히 선택할 수 있다면, 조금 더 휘둘리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을 거라 바라본다. 


힘들 때 조금 더 덜 아프고 기쁠 때 조금 더 웃을 수 있는 그런 삶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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