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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티 Dec 23. 2021

어차피 죽을 거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이유

죽음은 왜 그렇게 두렵고 슬픈 것일까? '죽음'이라는 단어는 내일의 기대도 현재의 설렘도 앗아가 버린다. 어차피 죽을 거 뭐하러 아등바등 산단 말인가? 아주 강력하게 사람을 허무하게 만드는 주문이다. 그렇다 죽음의 공포가 있는 한 인간은 절대로 행복하게 다시 말해 온전히 쾌락을 즐길 수가 없다. 내일이 없을 것처럼 살라는 말처럼 오늘 하루를 충실히 살아야 하겠지만, 넷플릭스 <지옥>처럼 죽을 날짜를 '고지' 받는다면 온전히 내 일상을 즐길 수가 있을까? 죽음에 대한 공포 앞에서는 진시황제도 이건희 회장도 삶의 유한함을 극복하지 못했다. 절대권력도 평생 쓸 수 없는 돈도 누릴 수 있는 팔다리가 움직일 때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삶은 유한하지만 우리는 애써 모른척하고 살아간다.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여름에 겨울 패딩을 장만하고 겨울에 에어컨을 미리 사듯이 내 관짝을 준비하지 않는다. 관짝 쇼핑은 그리 유쾌한 경험이 아니기 때문이다. 김영하 작가의 <보다 읽다 말하다>를 읽는 도중 '어차피 죽을 인생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이유'라는 제목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역시 작가는 현시대의 천재이자 멘토라는 말이 와닿는다. 실제로 본적도 만난 적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내 마음을 이렇게 정확하게 읽고 있단 말인가?  


바로 이 한마디 "어차피 죽을 거.... 뭘 그렇게 아등바등" 


지나온 세월을 생각하게 만드는 한 문장이다. 태어날 때는 가족들의 품 안에서 '함께'를 누리지만 죽을 때는 아무리 사랑해도 가족이 나를 대신할 수 없고 '혼자' 죽음을 맞이 할 수밖에 없다. 남겨진 사람들은 함께 슬퍼하고 기억하겠지만, 죽은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이미 죽은 사람은 보지도 듣지도 느끼지도 못한다. 죽음이 진짜 두려운 이유는 '혼자'가 되기 때문이 아닐까? 책에서는 노인들이 가장 두려운 것이 혼자 죽는 것이라고 하던데 아이러니한 것은 노인들이 죽었을 때 그들은 혼자라는 것도 죽음에 대한 공포도 느낄 수가 없는데 말이다. 아마 그들이 말하고 싶은 것은 죽음이 두려운 게 아니라 '혼자'라는 단어가 더 두렵다는 뜻인 듯하다. 


그렇다면 살아 있을 때도 혼자라고 느끼는 사람들 다시 말해 우울증을 겪고 세상과 분리되어 있다고 사람들은 죽음을 이미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게나 다름없다. 혼자 있으면 하게 되는 생각은 거짐 쓸데없을 뿐 아니라 부정적이고 비관적이다. 세상이 나만 빼고 행복한 듯하고 나만 무가치하고 쓸모없는 사람처럼 느끼기 마련이다. 인스타의 화려한 친구들의 여행과 일상을 보는 눈과 동시에 손가락은 하트를 누르지만 누구도 자신에게 사랑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우울증 환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누구나 오랜 시간 혼자 있으면 우울함을 느끼게 된다. 사람과의 단절과 분리라는 두려움. 마치 우리 집 강아지가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들어온 나를 보고 그렇게 반기고 서러워하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강아지에게 1시간이 4시간이듯이 그 녀석은 나를 8시간이 아니라 32시간이나 기다린 것이다. 분리불안은 겪는 강아지는 스스로 소변도 대변도 보지 않는다. 사료도 안 먹고 멍하니 주인이 오기만을 기다린다. 기다리는 그 시간은 아마 우주에 홀로 앉은 것처럼 시간이 흐르지 않을 것이다. 왜 죽어있는 '시간'이니까 말이다.


분리불안은 겪는 강아지 우울증을 겪는 사람은 모두 혼자 있는 시간이 길고 많다. 그래서 한 번씩 사람이라도 마주치거나 만나면 과하게 반응을 하고, 유쾌한 척을 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착각을 한다. 아 성격도 좋고 유쾌하니까 주변에 사람이 많겠구나. 그래서 나는 방송인 노홍철이 TV에 나오면 아무 생각 없이 웃지를 못한다. 혼자 씩씩한 척 밝은 척하는 그가 남 같지 느껴지지가 않는다. 가끔 삶에 지쳐 모든 걸 던지고 포기하고 싶을 때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하지만 나의 경우는 혼자 있는 시간은 또 다른 분리불안을 안겨다 준다. 먹는 것도 움직이는 것도 귀찮아지고, 무엇보다 삶이 덧없다고 느낄 때가 자주 있다. 어차피 죽어버리면 이 모든 고민도 번뇌도 가슴졸임도 심지어 대출마저도... 사라지는 말이다. 


대학교 새내기 시절 동아리 소개를 할 때 한 선배가 그랬다. '살아 있으면 움직여라' 다소 오글거리는 멘트로 댄스 동아리 가입을 권유했다. 그 유치하고 찬란한 순간이 그립다. 어차피 그거 춤도 나이 먹으면 못 추고, 돈 버는데 하나 쓸모없고 내가 뭐 프로 댄서가 될 것도 아니지만 미쳤다고 수업도 빼먹고 하루 종일 연습실에서 살았다. 제대로 기본기를 갖춘 것도 아니고, 그저 영상을 보고 따라 하는 율동에 불과했지만 뭐가 그렇게 신나고 재미있었는지 과거에 돌아가서 나에게 묻고 싶다. 


아마 그렇다면 20대의 '나'는 지금의 '나'에게 뭐라고 답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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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죽을 거 재미있게 살아아죠!"라고 답을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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