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눈에 보는 조선왕조실록 근대 편 5

황제가 됐다가 쫓겨나는 고종

by 제이티

15. 황제가 된 고종과 독립협회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지내는 동안 조선의 정세는 미묘하게 돌아갔다. 그간 조선에 들인 정성을 생각한다면 일본은 조선을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조선 민중의 거센 저항과 청과의 승부마저도 결판났는데 난데없이 러시아라는 놈이 오더니 말 몇 마디로 랴오둥 반도를 뱉어내라 하고 조선에서도 물러나라고 하지 않는 가 일본은 이제 러시아랑 2차전을 준비해야 하지만 러시아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영국과 프랑스마저도 두려워하는 러시아가 아닌가, 따라서 일본은 청보다 더 철저한 준비를 해야만 했다. 그 준비하는 시간만큼 모처럼 조선은 폭풍전야처럼 조용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어쨌거나 덕분에 조선은 시간과 기회를 벌었다. 힘의 공백기 상태 아닌 가 그런 상태에 1896년 독립협회가 형성된다. 창립자인 서재필은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다가 다시 언론인으로 미국에서 귀국했다.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미국식 근대화인 입헌군주제 및 근대적 공업 체제 민주주의를 수입해오기 시작한다. 일반 민중에게 자유주의 사상을 전파하고 독립문을 세우는 듯 정치활동을 개시한다. 서유럽식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독립협회가 고종의 심기를 상하게 한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협회는 고종을 역대 어느 왕보다 영예로운 지위로 격상시켜준다. ‘대군주’라는 용어를 썼고 ‘폐하’라는 용어도 사용했다.


때마침 1년 만에 돌아온 고종은 그토록 하고 싶었던 자주국가의 꿈을 실현하기를 원한다. 이제 왕이 아니라 중국에서 벗어나 황제가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사춘기 학생이 몸만 컸다고 부모로부터 독립이 되는 것이 아니다. 당연 독립국이라면 경제력과 군사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무늬만 제국인 대한제국은 일본과 러시아가 한 발자국씩 물러선 상태의 공허한 외침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저 명암만 업그레이드에 불과했다.


하지만 황제가 되고 싶어 하는 고종과 수구 친러파 조정과 미국식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독립협회는 당연히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가 없었다. 고종도 아내와 아버지처럼 권력만은 놓치고 싶지 않았나 보다. 쓰러져가는 나라이지만 한 줌의 권력이라도 쥐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다.


때마침 1898년 러시아는 조선에게 부산의 영도를 조 차해주고 요구한다. 러시아가 누구인가 고종을 친히 보살펴 준 큰 형님 아닌 가 당연히 수락하려고 했는데 독립협회가 이를 거부한다. 무려 1만 명이 넘는 군중이 규탄대회가 열었는데 이것이 바로 만민공동회라고 불린다. 서울 도심에서 반란이 아니라 대형 시위가 벌인 것은 처음이라 고종도 러시아도 당황해 영도의 조차 계획을 취소했다. 시민의 힘으로 정부와 외세를 압박한 처음 사례였다.


하지만 찬란한 순간은 오래가지 못한다고 했던가? 백성이 아닌 시민이 중심이 되는 사회를 고종은 원하지 않았다. 입헌군주제에 두려움을 느낀 고종은 결국 독립협회를 해산하고 간부들을 체포한다. 러시아 공사관에 1년이나 머무른 고종이니 러시아의 관계가 더 중요했을 것이다. 일본처럼 협박하거나 겁도 주지 않으니깐 말이다. 황제는 결국 황제권의 집착으로 독립협회가 가진 에너지를 개혁으로 돌리지 못했다. 근대화의 하드웨어가 산업혁명으로 상징되는 굴뚝에서 연기가 나고 공장이 돌아가는 산업화라면 이를 돌리는 소프트웨어는 시민 민주주의다. 고종은 이 소프트웨어가 얼마나 중요한지 미처 깨닫지 못했다. 바로 마지막 조선의 해법이 될 수도 있었던 방도였는데 말이다.


16. 러일전쟁

아관파천 후 몇 년은 러일 간의 세력 균형 기였다. 황제는 러시아의 군사적 보호를 계속 원했으나 러시아는 만족할 만한 답을 주지 못한다. 플랜 b로 생각해낸 게 중립화론 카드였다. 이름은 황제지만 어린아이처럼 누군가 보살펴줄 어른이 필요한 고종은 자주국방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부끄러운 군사력이 있었다. 그것도 쿠데타에 대비에 성만 간신히 지킬 만한 병력이었다. 자력으로 스스로를 지킬 수 없기에 대한제국이 존재하려면 러시아의 보호를 받거나 러일간의 세력 균형이 이어지거나 혹은 열강이 모두 대한 제국을 중시에 어느 한 나라가 집어삼키는 걸 막는 환경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열강들에게 이권을 고루고루 나눠준다. 철도 부설권 및 각종 삼림 채굴권 광산 채굴권을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넘어간다. 공정거래위원회처럼 어느 한나라가 독점하지 못하게 골고루 나눠주는 정책은 성공한 듯 보였다.


하지만 러일 간의 균형에 틈이 보이기 시작한다. 러시아 입장에서 더 큰 먹거리인 만주에서의 환경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다. 청나라에서 서양 세력의 반감으로 의화단 운동 우리로 치면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서양 세력은 연합군을 꾸려 진압에 나섰는데 진압이 되고 나서도 러시아는 만주에서 군대를 철수하려 하지 않았다. 만주를 홀라당 삼킬 의도가 있었던 러시아는 노골적으로 함대를 뤼순항으로 집결한다. 위기감을 느낀 영국과 일본은 동맹을 맺고 러시아를 견제하기 시작한다. 일본은 러시아에게 조선의 주도권을 넘겨주면 만주의 주도권을 러시아에게 넘기겠다는 협상을 하지만 끝내 결렬된다. 두 열강의 노골적인 야심이 드디어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이다.

협상 결렬은 곧 전쟁을 의미했다. 한반도에서는 각국 군사들이 공사관 보호를 명분으로 속속 서울로 들어왔고, 대한제국은 중립을 선언했다. 영국과 미국에 지원을 약속받은 일본은 청일전쟁처럼 먼저 뤼순 항을 기습 공격하고 대규모 군대를 제물포에 상륙한 뒤 선전포고를 한다. 제 아무리 힘을 키웠다지만 러시아는 땅덩이만 봐도 일본과 게임이 되지 않는 제국이고 천하의 나폴레옹도 러시아를 삼키지 못한 나라가 아니던가. 그런데 믿을 수 없는 결과가 나타난다. 바다와 육지에서 승리를 거듭하더니 지구 한 바퀴를 돌아온 발트 함대를 대한해협에서 전멸시켜버린다. 하지만 모든 예산을 쏟아부은 일본의 재정난도 만만치 않았다. 계속 전쟁을 이어나가기 곤란한 상황이었는데 승리의 여신은 일본 편이었나 보다.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면서 러시아 역시 전쟁을 계속하기 어렵게 되었다. 미국이 중재에 나서서 조약이 이루어지면서 드디어 일본은 조선에 대해 독자적인 권리를 얻게 된다. 청일전쟁으로 수천 년 동안 한반도를 지배했던 종주국 중국을 물리쳤고, 러일전쟁으로 새로운 종주국 러시아를 물리쳤다. 이제 일본은 단독 종주국 조선의 큰 형님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일본은 종주국 다시 말해 큰 형님 정도로 만족하지 않았다. 대신 조선을 통째로 갖는 방법을 택한다.

17. 을사조약


강화도조약부터 임오군란 갑신정변 청일전쟁 그리고 마지막 러일전쟁에 이어서 눈치 볼 거 없는 일본은 이제 조선을 마음껏 주무르기 시작한다. 러시아를 몰아냈으니 이제 누구도 조선을 탐내지 못하게 영국과는 열 일 동맹 미국과는 가쓰라-테프트 밀약으로 일본은 확실하게 서류 정리를 끝낸다. 다음으로 러시아와 포츠머스조약으로 완전하게 조선을 넘겨받는다. 조선의 왕이 아니라 영국 미국 러시아에게 조선을 받는다. 분명 조선의 주인은 고종이었으나 다른 나라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나 보다. 이제 마지막으로 조선의 인감도장을 빼앗기 시작한다. 애초 허수아비 왕이었으나 이제는 스스로 사인도 할 수 없는 왕이 돼버린 것이다. 이른바 을사조약으로 일본에게 외교권을 넘겨준다. 조약 체결 소식이 전해지자 나라 안은 충격에 휩싸인다.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논설로 조약의 부당성을 알렸고 이를 체결한 을사오적을 벌하라는 상소가 이어진다. 이완용으로 대표되는 누구나 알고 있는 매국노 파이브는 민족의 배신자로 기억된다. 이미 인감도장을 뺏긴 고종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입이 있어도 말을 못 하고 황제라고 이름을 바꿨지만 누구도 황제라고 불러주지 않는데 어찌 힘을 있겠는가? 연일 신하들은 자결로써 조약의 부당함을 알리고 백성들은 의병을 조직해 반대의사를 표했으나 이미 때는 너무 늦었다. 사실 이완용 등 5적이 없었어도 조약은 하루 이틀 늦춰졌을지언정 이루어졌을 것이다. 전쟁의 승자인 일본이 내린 결론이고, 이미 열강의 동의를 얻은 방침이다. 더구나 일본군이 총칼로 궐을 에어 싼 상황에서 대신들이 모두 반대했다면 다른 대신으로 교체하고 뜻을 이루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인물로만 책임을 따진다 해도 가장 큰 책임은 고종에게 있다. 어렸을 때 아버지에 휘둘리고 젊은 시절 아내의 치마폭에 싸여 지내다가 아버지와 아내가 사라진 뒤에도 남의 집에 얹혀살다가 자주 국권을 외치는 독립협회도 탄압했다. 고종은 을사오적보다 훨씬 더 무책임한 매국노다.


18. 물러나는 고종


고종은 어떤 왕으로 기억되는가? 비운의 왕? 불쌍한 왕? 하지만 고종은 중요한 고비마다 강단 있는 태도를 보인 적이 없다. 숱한 전란과 반란을 겪으면서 트라우마가 강했던 것일까? 그때마다 황제는 몸을 낮추고 입을 다물었다가 시간이 지나면 반전이 이루어졌다. 왕비 시해 후 숨 막혔던 감금 생활도 조심스럽게 가능한 방법을 동원해 극적으로 벗어났다. 을사조약 후에도 심각성을 느꼈지만 또 한 번의 반정을 기대했다. 그러나 상황은 더 열악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으로 취임 후 내정간섭을 시작하면서 황제의 권한이 약화됐다. 끊임없이 의병을 지원하고 각국에 특사나 친서를 보내 조약 무효화를 외치기도 했다.

때마침 큰 기회가 찾아온다.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린다는 것이다. 여기에 참석하여 조약의 부당함을 알리려 이준 특사를 파견한다. 특명을 안고 회의가 열리는 헤이그로 갔으나 테이블에 조선의 자리는 없었다. 이미 도장을 뺏긴 조선은 외교권이 없어서 이름조차 알릴 수 없었다. 이에 이준은 자결로 부당함을 알렸지만 그러나 그뿐 외국의 동정을 살 수는 있지만 동정만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 만국 평화회의지만 사실상 열강 간의 이해 조정 회의였고 세계를 움직이는 힘은 여전히 정의보다는 힘이었다.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했지만 잡았다 해도 지푸라기였다. 이는 곧 일본에게 알려지게 되고 고종이 할 수 있는 방법은 퇴위밖에 없었다. 그렇게 44년의 재위를 마치고 고종은 물러나게 된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한눈에 보는 조선왕조실록 근대 편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