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짓기를 말할 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 6

ep 6. 조금 낯설게 조금 다르게 하지만 친절하게

by 제이티

작가들의 글을 보면, 흠칫 놀랄 때가 많다. 당연하고 뻔한 문장에 생명력을 넣는 기술. 그 기술은 오직 작가만이 할 수 있는 금단의 영역일까? 특히, 소설을 쓰는 작가들의 글을 보면 일반 사람들은 무심코 넘어갔을 만한 장면도 새로운 시선으로 나타낸다. 명대사와 주옥같은 표현은 많은 사람에게 울림을 주고, 여러 번 그 문장을 음미하게 만든다. 도대체 이러한 실력은 어디서 왔을까? 그저 주사위 튕기듯이 하늘에서 정해준 자들만 누리는 특권 같은 것일까? 노력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는 “신내림” 같은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특히, 토지를 쓴 박경리 님의 문장을 보고 있노라면, 한글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구나를 느끼고, 기욤 뮈소의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를 읽으면, 분명 소설인데 미드를 보고 있는 것처럼, 다음 페이지가 궁금해서 잠을 이룰 수가 없다. 또한 이석원 작가의 “보통의 존재”를 읽다 보면, 출근하고, 밥 먹고, 집으로 돌아오는 일상마저도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 준다. 분명, 나는 이들을 만난 적도 없는데 오랜 친구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 일까?


단순히 글을 잘 써서? 독자들에게 공감이 가는 표현이 많아서? 아니면 작가 특유의 감성 때문일까?


물론 한 가지 답을 내릴 순 없겠지만 내가 느끼는 바는 작가들은 세상을 조금 다르게 느끼고 표현한다는 점이다.


“가령 전화를 받았다.”라는 표현은 이렇게 바뀐다.


“벨소리가 울리자 핸드폰을 오른쪽으로 밀고 왼쪽 귀에 갔다 댔다.”

별거 아닌 표현인데 머릿속에 장면이 하나하나 그려진다.


라면을 먹을 때도 마찬가지다. “호로록 라면을 먹었다.”라는 문장은


“젓가락으로 서너 번 휘저은 면발은 곧장 입으로 직진했다. 마치 불어 터진 면은 입에서 허락하지 않은 것처럼.”

라면 먹방을 보고 있는 것처럼 눈 앞에 생생하게 그려진다.


너무너무 신기했다. 어떻게 그들은 이러한 표현을 쓸 수 있단 말인가? 하늘을 왜 이러한 능력을 나에게 주시지 않은 것일까? 어떻게 하면 낯설게 표현할 수 있는지 많은 고민을 했다. 눈으로 보이듯이, 마치 귀에 들리듯이 말이다. 낯설게 표현하는 방법은 국어 교과서처럼 그렇게 활동 몇 개 푼다고 몸에 배는 것은 아니다. 따라 할 순 있지만 거기 까지다.


그래서 연습을 해보기로 했다. 가령 오늘 한 일은 담백하게 적어보자.


예시) 퇴근하고 오자 마자, 강아지랑 산책을 했다. 그리고 밥을 사 먹고 카페에 가서 책을 읽었다. 2시간쯤 있다가 헬스장에 가서 운동을 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누웠다.


위의 예시는 진짜 있었던 일을 그대로 적은 것이다. 그런데 쓰고 다시 읽어 봤더니 하루가 정말 짧은 듯 고작 2개의 문장이 내 삶의 전부라는 생각이 드니 허무했다.


어떻게 하면 이 죽어버린 문장을 살릴 수 있을까? 작가라면 어떻게 하루의 일상을 담아낼까? 일단, 작가들은 글은 너무나 친절하다. 마치 오랜만에 만나 4시간 수다를 떠는 친구처럼, 때로는 유튜브 v-log처럼 있었던 일을 생생하게 표현한다. 왜냐하면, 작가들은 혼자 쓰고 읽는 일기를 쓰는 게 아니라,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글을 쓰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나칠 정도로 친절할 필요가 있다. 저 위의 문장만 읽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 밖에 없다. 저 두 문장이지만 나는 무슨 일을 했는지 머릿속에 장면들이 떠오른다. 하지만 나를 모르는 사람이 저 글을 읽었을 때는 어떤 생각이 드는지 말 안 해도 알 것이다.


이제 작가처럼 바꿔보자.


예시) 남보다 10분 먼저 퇴근을 해서 인지, 오늘따라 도로는 막히지 않았다. 요 며칠 시끄러웠던 도로 공사가 마무리된 듯 2차선인 도로는 4차선으로 바뀌었고, 차 선은 두 배로 늘어난 만큼 시간을 20분에서 10분으로 단축되었다. 그렇게 평소보다 일찍 집에 도착했다. 하루 종일 나를 기다린 듯한 강아지의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가득했다. 오랫동안 함께 있어주지 못한 미안함 때문인지 오자마자 서둘러 외투를 벗고, 편안 반바지로 갈아 입고, 목줄을 찾았다. 눈치라도 챈 듯 이 녀석은 벌써 현관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마치 사람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문을 한 번 보고, 내 눈을 두 번 바라봤다. 어쩌면 이 녀석은 말을 할 수 있는데 못하는 연기를 하는 것 같다. 산책은 강아지에게 있어서, 마치 주말을 앞둔 직장인처럼 설레는 그런 것이다. 동네를 두 어바퀴 돌고 실컷 냄새를 맡은 후에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어느덧 출출해진 배를 붙잡고, 냉장고 문을 열었으나, 먹을 수 있는 건 케첩과 물뿐이었다. 어쩔 수 없이 삼선 슬리퍼를 신고, 밖으로 나갔다. 우리 동네는 고깃집 아니면, 치킨집 밖에 없어서 혼자 사는 나로서는 끼니를 챙기는데 여간 어렵다. 마침 큰 맘 순댓국이 있어서 다행이다. 그렇게 늘 먹던 메뉴로 간단히 끼니를 해결한 후 자주 가던 카페로 향했다. 딱딱하고 조금은 불편한 카페 의자는 묘하게 긴장감을 주어서 책이 잘 읽힌다. 집에서 읽으면 읽다가 누워버리는데, 카페는 누울 수 없어서 최적의 독서 장소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딱딱한 의자와 불편한 책상은 오랜 시간 독서를 허락하지 않았다. 일어서서 집으로 곧장 갈까 하다가, 그냥 자면 분명 허리가 뻐근할 거 같아 헬스장을 향했다. 딱 데드리프트 5세트만 들고 가야지 했는데, 역시 파워 랙 앞은 언제나 남자들이 득실거린다. 어쩔 수없이 다른 기구로 운동을 하고, 땀이 살짝 나려고 할 때 집으로 향했다. 씻고 누우니까 하루가 그렇게 가버렸다. 매번 느끼지만, 잘 때는 아무 생각이 없어야 잠이 온다. 아까 마신 커피 때문인지, 무슨 고민 때문인지 뒤척인다.


분명 두 글 모두 있었던 일은 똑같다. 하지만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처음의 글은 “나”만 아는 글이고, 두 번째 글은 “나” “독자”가 모두 아는 글이다.


글을 쓸 때 무의식적으로 간단한 문장으로 끝내려는 경향이 있다. 물론 글의 성격에 따라서 그러한 문체가 필요한 경우도 있으나, 글을 쓰는 사람을 지도할 때 하나 같이 겪는 문제점이 쓸 말이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석원 작가님은 소소한 일상을 그렇게 특별하게 나타내는 데 왜 보통 사람은 안 되는 것일까?


바로 연습을 안 해서이다. “낯설게” “친절하게” 쓰는 연습 말이다.


2줄짜리 문장을 16줄짜리로 바꾸는 기적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다. 보고 듣고 느끼는 대로 처음 보는 사람에게 길을 가르쳐 주듯이 그렇게 친절함이 필요하다. 길을 알려줄 때 “저기로 조금 내려가서 마트 위에서 조금만 올라가시면 됩니다.” 이런 식으로 길을 알려줬다간 영원히 못 찾는다. 다행히 요즘 시대는 내비게이션이 있지만 말이다.



이번에는 학생의 평범한 일상이 어떻게 낯설고 친절하게 바뀌는지 보자.


내 생각은 원래 무엇이었던가?
-나보다 글 잘 쓰는 제자 찌예-

틱틱. 보글보글. 어떤 한 소리가 내 귀에 꽂힌다. 친구들과 노는 소리가 들리고, 자전거가 나간다고 띠 링링 울리는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어떤 소리도 듣고 싶지 않다.

단 이 한소리는 듣고 싶다. 그것은 치킨을 튀기는 소리이다. 기름에 60마리가 튀겨지는 60계 치킨을 먹고 싶어서 15분째 기다리는 중이다. 다리가 아파 죽겠지만 좀 있다의 행복을 위해 내 다리쯤을 양보하고 있는 중이다. “6번 후라이드 2개 시키신 분~”. 드디어 치킨이 완성되었다. 띠띠띠띠띠. 집 비밀번호를 누르고 후다닥 탁자를 치운다. 커다란 비닐봉지 안에는 종이박스 안에 담겨있는 후라이드 두 마리와 2L의 콜라, 두 개의 무가 들어있다. 치이익~ 경쾌한 소리를 시작으로 뽀얀 속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우리에게는 들리는 말소리 대신 바사삭한 소리가 들린다.

15분이 지나자 내 배속은 배부르다는 소리가 들려온다. 치킨은 거의 반 이상이 남은 채로 냉장고에 넣어버린다. “아 내일 먹으면 맛이 없는데...”. “그럼 먹지 마~”. 엄마가 말한다. 다음날 저녁에 엄마가 에어프라이어에 치킨을 데워서 접시에 옮겨 담고 식탁에 둔다. 나는 치킨 한 마리를 집어서 밥그릇에 올려두고 치킨을 먹기 시작한다.

그때 엄마가 말한다. “너 어제 치킨 안 먹을 거라며”. “아 몰라~ 있으니까 먹는 거지”. 치킨을 다 먹고 나자 나는 맛있는 듯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오빠와 엄마는 나를 이상한 듯 쳐다본다. 나는 어제 냉장고에 넣어둔 치킨을 안 먹는다고 하였지만 지금은 어제의 말과 다르게 먹고 있지 않은가? 그냥 먹으면 장땡이다. 어제는 안 먹는다는 치킨을 지금 먹고 있는 것은 인지부조화이다.

인지부조화는 내가 치킨을 먹고 다음날 안 먹는다고 했지만 지금 먹고 생각이 바뀌는 것이다.

나는 왜 생각이 바뀐 걸까? 우리는 사실이 거짓이 되고, 차라리 거짓을 진실이라고 믿게 대답해야 살아남는 세상에 살고 있는것 같다.
“맛있지?”라는 표정으로 물어보는 엄마.

우리는 진실이 아니라 엄마의 마음에 드는 말을 해야 엄마를 기분을 좋게 할 수 있다. 우리는 생각대로 말하고 행동하고 나서야 생각을 바꿔 버리는 게 익숙하다.

인지 부조화는 결과에 따라 생각이 바뀐다. “나는 원래 ~~ 하려고 했어”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치킨은 맛없어도 맛있는 척! 공부를 못해도 잘하는 척! 척! 척! 척!이라고 해야 사람들이 나를 좋게 보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우리는 척척척 세상에 살고 있다.


"치킨을 먹었다. 배불러서 남겨서 다음날 먹었다." 이러한 평범한 경험이 얼마든지 작품이 될 수 있다.

치킨이 튀기고 기다리고, 먹고, 남기고 생각하는 모든 일련의 과정 속에서 그때그때 머릿속에 떠도는 장면과 냄새, 소리, 생각, 감정 모든 것을 담아내야 한다. 작가처럼 말이다. 조금 낯설지만 친절하게




학생들을 지도할 때 늘 하는 말이 있다.


“5살짜리 아이에게 길을 알려주듯이 글을 써야 한다."


5살 아이는 어려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최대한 쉬운 말로 아이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바꿔서 알려줘야 한다.


5살짜리에게 수학 정석을 풀게 할 순 없지 않은가?


수 모형에 막대기에 장난감에 율동까지..

그렇게 가르쳐야 한다.


그것이 글쓰기의 시작이다.




오늘도 영감을 주는 제자가 있어서 글을 계속 쓸 수 있어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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