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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티 Oct 14. 2022

존재만으로

"내 모습 있는 그대로" 


사람을 목적 그 자체 어떠한 수단이나 도구화해서는 안된다는 칸트 선생의 말씀이 조금이 가소로워 보였다. 현실적으로 맞지도 않을뿐더러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인간관계가 따지고 보면 서로 필요와 필요로 만나는 관계가 아니던가? 편의점을 갈 때 알바의 이름이나 성격 그날의 컨디션과 심리적 상태 따위는 궁금해하지는 않는다. 그저 내가 돈을 건네주고 커피를 다시 내게 주는 사람, 식당을 가도 마찬가지고, 분명 식당의 이모의 이름은 이모가 아니지만 전국 어디를 가도 이모로 불리듯이 말이다. 먹고살려면 모름지기 손님과 거래처가 필요하고, 나라 간 무역과 외교도 서로 간 이해관계가 있을 때나 얼굴 보고 환하게 웃고 악수하는 것이지, 안 그러면 전쟁이다. 


굳이 정치인과 기업인의 유착관계가 아니더라도 서로 줄 거 주고받을 거 받는 아름다운(?) 관계가 지속되는 자본주의 세상에서 사람을 도구가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는 칸트의 주장은 얼마나 공허한가? 그렇게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게 지구 같은데 말이다. 폴 세잔은 사물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위해 자신의 와이프를 열 시간을 넘게 의자에 앉게 했고, 피카소는 사물의 본질을 그 자체를 알기 위해 대상 하나하나 찢고 나서야 입체파의 거장이 되었다. 대체 왜 이러한 쓸데없고 쓸모없는 짓을 했을까? 대체 있는 모습 그대로가 무엇이길래? 


그렇다면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관계가 아마 가족 혹은 연인 친구라는 관계일까? 아무 이유 없이 그 사람이 잘되면 좋겠고, 대가를 바라지 않고 그저 행복을 빌어주는 게 자식을 둔 부모의 마음일까? 하지만 이런 말도 무색하게 부모는 자식에게 자신의 못다 이룬 꿈을 투영하거나 더 나은 먹고살만한 미래를 보장한 다는 믿음으로 기대와 바람을 불어넣기 일쑤다.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기 위해서, 부모님께 부끄럽지 않은 자식이 되기 위해서 살아간다는 게 어쩌면 돈으로 얽힌 관계보다 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손절할 수도 없고, 끝까지 들고 있어야 하는 팔리지 않는 주식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친구관계는 어떨까? 나에게 도움을 주는 친구 혹은 같은 있으면 내 가치를 돋보이는 수단으로 친구가 이용되고 있지는 않을까? 오랜만에 걸려온 친구의 전화는 정말 오랜만이지 아무 이유 없는 전화는 없다. 결혼이든 보험이든 부탁이든 크고 작게 서로가 원하는 거 하나쯤은 숨기고 카톡에 손가락을 얹기 마련이다. 가령 이러한 이유가 아니더라도 그저 내가 심심해서 외로워서 친구를 만나거나 연인을 만난다면, 나는 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그저 무료함을 달래줄 장난감이 필요한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고 혼자 밥 먹기 싫을 때, 그냥 내가 심심할 때만 사람을 찾았던 순간의 기억이 많지 않았던가? 


스팸전화나 광고를 유도하는 전화가 오면 받는 순간 마음의 문이 닫힌다. 접근의 목적 자체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저 나를 팔아서 이용하기 위한 전화라는 것을 분명히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상처를 입게 된 순간은 친구라고 생각했던 혹은 믿었던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나를 그저 "이용"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을 때이다. 모순적이고 아이러니하다. 당연히 서로가 필요에 의해 만나고 헤어지는 게 당연한 데 

왜 뒤늦게 나를 이용했다는 기분이 들면 모욕적이고 상처를 받게 될까? 그저 모르는 사람과 아는 사람의 차이일까?


광고 속의 연예인이 아무리 웃고 있어도, 이는 나를 향해 웃고 있는 게 아니라 나라는 고객에게 웃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그리 기쁘지 않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자신을 '역할' 혹은 악당의 '비서' '쓸모'로만 대우받을 때 불행하다. 그래서 진정한 웃음과 미소는 직장에서 나오지 않는다. 춤을 추는 사람도 누군가의 뒤에서 백업댄서로만 무대에 서기를 원하지 않는다. 누구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존중받기를 원한다. 하지만 주인공은 하나 이길래 어쩔 수 없이 뒤에서 주인공을 빛내 주지만, 주연을 위해서 태어난 조연은 없다. 


부모는 자녀가 자신의 얼굴을 얼마나 빛내줄 것인지, 자녀는 부모가 얼마나 유산을 물려줄지, 저 사람 덕분에 내가 얼마나 행복할지?, 나를 감당하고 받아줄 사람이 있을지.. 저 사람 덕분에 내가 얼마나 편히 살지.. 

목적이 분명한 관계는 목적이 어긋날 때 돌아서기 마련이다. 그 상황을 배신이라고 부를까? 계약 위반이라고 부르는게 더 타당할까?


있는 그대로 누군가에게 기대하지도 바라지도 않은 관계가 과연 있을까? 아마 있다면 그게 바로 사랑이라는 단어일까? 그렇다면 나는 아직도 진정한 그 단어의 의미를 가슴으로 새긴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공허함이 밀려오나 보다. 왜냐하면 돈으로 산 것은 언젠가 버려지기 마련이기 때문에. 그게 사람이든 물건이든 말이다. 그래서 돈이 많다고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것을 사도 행복이라는 단어에서 멀어지기 일쑤다. 언젠가 버려지듯이 나 또한 쓸만한 상품에서 쓸모없는 쓰레기가 될 수 있을거라는 불안감이 밀려오기 때문이다. 


폴 세잔이 왜 평생을 바쳐 사물의 모습을 있는 모습 그대로 그리려고 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세상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살아가니깐 말이다. 이용하려는 마음 없이 진정 그 사람이 잘되고 행복하기를 바란다면, 아마 그 사람도 나를 그렇게 생각해 주지 않을까? 이 역시도 대가성이 있는 문장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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