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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티 Sep 29. 2022

진짜 나 vs 가짜 나

이건 진짜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야. 푸념 섞인 대사 끝에 주인공은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문밖을 뛰쳐나가 차가운 세상을 맞이하고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해 온갖 시련을 겪고 끝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푸른 사자 와니니처럼, 이태원 클라쓰 속 박새로이처럼 지금 현실의 내 모습은 내가 아니며 저기 바다 건너 우주 건너 새로운 삶이 나를 기다리고 반겨줄 거라고 희망으로 오늘을 버텨낸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모임에서 살아남기 위해 억지로 환한 표정을 지을 때, 회의에서 영혼 없는 자동응답기가 되어가는 내 모습을 발견할 때, 때론 아들로 누군가의 친구로, 부장으로 역할을 강요받을 때 고정관념을 따르는 사회적인 규칙을 지키라고 강요받을 때, 누구나 한다는 대학-취업-내 집 마련-결혼-이라는 보통의 삶을 따라가려고 고군분투할 때. 이럴 때마다 누군가의 기준으로 맞춰 살아가야 하는 현실에서 지금의 내 모습은 진정한 '나'가 아니라 그저 먹고살기 위해 적응하려는 것에 불과하고 저기 멀찍이 어딘가에 반짝이는 등대처럼 진짜 '나'가 있을 거라고 다짐하고 생각한다.


내가 나를 찾으러 여행을 떠난다니 내가 여기에 있는데 저기에 또 다른 내가 있을까? 일상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지만, 이는 정신병 초기에 가까운 증상이다. 왜냐면 이보다 모순적인 말은 없기 때문이다.


신을 믿는 사람에게 증명할 수도  수도 없는 신을  믿느냐고 질문을 하면 반대로 신을 믿지 않은 사람은 무엇을 믿을까?  자신을 믿는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자신은 대체 누구일까? 내가 알고 있는 나의 모습일까? 아니면 내가 믿고 싶은 이상화된 나의 모습일까? 결국 신을 믿는다는 말과 나를 믿는다는 말은  뿌리가 같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지금 여기에 없는 것을 있다고 믿고 있으니까.


플라톤이 말한 현실 넘어 "이데아"의 세계가 분명히 존재하고 이 세상은 그저 그림자라고 하는 터무니없는 주장이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은 천국과 지옥 그리고 진정한 나와 가짜 나를 구분 짓는 이분법이 아직도 유효하기 때문이 아닐까? '진정한 나'라는 개념은 '신'과 '이데아' '진리'와 공존해야 의미가 유지될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살고 있는 가면을 쓰고 있는 나는 허상이고 가짜일까? 내가 바라는 삶이 아니었으니까? 그렇다면 내가 바라는 그럴듯한 벤츠 타는 성공한 사람이 되면 그게 내 모습일까?


진정한 나를 알기 위해 산도 타보고, 그 힘들다는 마라톤도 완주해보고, 철인 3종 경기도 완주했다. 마라톤을 처음 시작할 때 인생을 알 수 있다고 했는데, 인생은 커녕 빨리 샤워하고 싶다는 생각과 역시 교통수단은 인간의 발이 아니라, 자동차가 짱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 무언가 크게 느끼는 건 없었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떠오르는 일출을 보며 해를 보고 새로운 인간이 되겠다고 다짐을 했지만 다짐보다 기억에 남는 게 영하 37도의 손발이 오그라드는 추위와 입술이 터진 매서운 칼날의 바람이 기억에 남는다. 거기서 깨달은 나의 모습은 무엇일까? 극한의 고통 속에서 진정한 내 모습을 느꼈나? 아니면 단순히 땀 흘리고 고생한 뒤에 오는 맥주 한 모금의 달콤함을 사랑하는 내가 진정한 내 모습 일까? 아니면 다시 월요일에 묵묵히 직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나의 모습일까?


볼 수 없는 것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한 동경은 별을 사랑하는 고흐의 마음처럼 불안하고 두려울 수밖에 없다. 쇼윈도 뒤에 분명히 보이는 만질 수 없는 반짝이는 물건이 내 것이 되었을 때 그렇게 반짝이지 않을 것처럼 내가 원하고 바라는 진정한 내가 그렇게 반짝이지 않으면 얼마나 공허하고 허무할까? 그렇다고 마지못해 살아가는 지금의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살아가자니 조금은 초라한 거 같다. 비닐 포장지를 떼어낸 상품처럼 느껴지니까 말이다.


어쩌면 여러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다양한 역할을 하고 이중인격적인 '나'가 진정한 나일 수도 있겠다. 친구들과 만날 때는 시끌벅적하지만 집에서는 한 마디 안 하는 사람일 수도, 손이 많이 가는 자식이지만, 학생들 앞에서는 재미있는 선생일 수도 있다. 그리고 나를 잘 아는 사람은 내가 그렇게 유쾌하고 밝지 않다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mbti는 분명 entp라고 하는데 때로는 i가 나를 지배하는 것 같기도 하고, 오락가락하는 내 마음이 혼란스럽다.


어쩌면 진정한 나 진짜 나의 모습은 언제 어디서나 변하지 않는 하나의 모습이 아니라 여러 상황에서 보이는 나의 다양한 모습일 수도 있다.  일관성 있는 토마토 같은 나 다운 모습을 지켜야하 한다는 강박에 벗어나 상황에 맞게 내가 원하는 사람 혹은 남이 원하는 사람 혹은 내가 원치는 않지만 해야만 하는 역할이 있는 사람이 공존하는 게 진정한 내 모습이 아닐까? 나를 알기 위해 산을 타거나 마라톤을 뛰거나 동굴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내가 마주하는 여러 상황에 나를 던져봄으로써 나도 모르는 내 모습을 발견하는 게 진정한 나를 발견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나도 몰랐고, 우리 가족도 몰랐기 때문이다. 또한 보기와 다르게 조용한 곳을 좋아하는 것도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남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한다. 나를 사랑하는 것도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그러려면 여기를 벗어나 낯선 저기로 나를 던져볼 필요가 있겠다. 나를 더 잘 알기 위해서이다. 그게 가짜든 진짜든 내가 원하는 모습이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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