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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티 Dec 01. 2022

약자 혐오

평등은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기회를 균등하게 주는 형식적 평등 그리고 사회적 격차를 조절하는 좀 더 적극적인 실질적 평등. 둘 다 맞는 말이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 실질적인 평등 다시 말해 약자에게 더 기회와 혜택을 주자는 평등을 주장하면 역차별이네 감성이네 공산주의 발상이네 하면서 뭇매를 맞기 십상이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평등은 기회의 균등인데 실질적 평등을 주장하는 사람은 결과의 평등까지 보장하려고 한다며 노력하지도 않고 거저먹으려 한다는 이른바 거지근성이라며 깎아내린다. 하지만 이들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역사를 공부를 하지 않은 게 분명하다.  


처음 자본주의가 탄생했을 때는 국가을 악이라고 지정하며 최소한의 간섭과 규제를 주장했다. 이른바'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스스로 조절되니까 국가는 그저 신호등 역할만 하라고 했다. 하지만 그런 사회는 나타나지 않았다. 신호등만으로 교통체증을 막을 수 없듯이 예상치도 못한 변수가 나타난 것이다. 빈부격차가 심화되어 사회가 불안해지고 독점 발생으로 수요공급 시장기능이 마비되고 오히려 자원이 효율적으로 배분되지 못했다. 이러한 배경으로 사회주의 사상이 퍼져나가고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자 혁명의 불길이 두려운 유럽 국가들은 선거권을 확대하고 복지정책을 확대해서 사회 국가 원리가 민주주의 국가의 기본 원리가 되었다.


다시 말해 격차를 해소하지 않으면 공산국가 될까 봐 두려웠던 미국 및 유럽 국가들이 '실질적 평등' 개념을 헌법에 집어넣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까 자유민주주의 국가는 원칙적으로 실질적 평등이 맞다. 하지만 법은 언제나 맞는 말은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는 게 현실 아닌가?  사람들은 약자에게 퍼주는 게 오히려 공정한 경쟁을 저해하고 국가 발전을 맞으며 다른 일반인들의 기회를 빼앗는 거라 주장한다.   


그러나 실질적 평등이 공산주의처럼 결과적 평등이 결코 되지는 않는다.


미국 대학입시에서 흑인 학생에게 가산점을 주는 소수집단 우대정책을 시행해서 억울하게 떨어진 백인 학생이 있었다. '내가 대학 합격하기에는 얼굴이 너무 하얀 가요?'라고 외치며 역차별 문제가 대두되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로 대학 진학 시 이른바 가산점을 받고 합격하는 학생을 수시충 혹은 지균층으로 비하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런데 소수집단 우대정책을 했다고 해서 미국 주요 대학의 인종 비율이 역전된 것도 아니고 인종별 비율이 일치하게 된 것도 아니었다. 복지혜택을 받아서 부자 되었다는 사람도 본 적이 없다. 그저 최소한의 사람답게 인간의 존엄을 유지하는 생계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재난 지원금을 전 국민에게 주느냐 누구는 주고 나는 왜 안 주느냐? 나랏돈을 퍼다 막 주는 게 맞냐? 등으로 논란이 되고 또 역시 댓글창은 마비가 된다. 그러면서 나오는 말이 있다.


불쌍한 사람이 꼭 그렇게 착하지가 않더라.


언더도그마 ‘약자는 무조건 선하고 강자는 무조건 악하다고 인식하는 사회적 현상’


실제 범죄 통계를 보면 범죄자는 주로 빈곤 계층인데 재벌이나 권력자들을 주로 악역으로 그리는 것은 현실과 다르지 않느냐고 주장한다. 실제 범죄자 수의 빈곤계층에 속하는 것은 많다. 이는 빈곤 계층의 수가 부유층보다 많기 때문에 절대적 양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태원 클라쓰의 회장님은 악역이고 박새로이는 가난하지만 정의롭다. 왜 그럴까? 일단 빈곤계층의 범죄는 크기와 약발이 상대적으로 작지만 재벌 회장님의 횡령이나 국회의원의 범죄는 국가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클라쓰가 크다. 수만 명을 실업자를 내 몰 수 있는 회장님의 경영 방만과 레고랜드 사태만 봐도 소위 노블레스 계층의 범죄가 훨씬 영향력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사회에 심각한 해악을 미칠 수도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는 사람이 재벌보다는 상대적 가난한 사람이 많기 때문에 시청률을 의식한 것도 아닐까? 재벌들이 자신들을 나쁘게 묘사하는 드라마를 볼리가 없을지언정 상대적으로 박새로이를 응원하는 이른바 언더독 팬덤이 훨씬 많으니깐 말이다. 현실에서 이루지 못하지만 60분 동안 만은 정신승리를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데 언더도그마의 반발은 너무나 쉽게 약자 혐오로 이어진다. 이른바 부자 동네는 매너도 좋고 가난한 동네는 거친 말에 다가 담배꽁초가 아무렇게나 떨어지고 알바에게 진상짓을 많이 하는 광경이 익숙하기 때문이다. 실제 외제자 수리센터에 오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여유 있고 젠틀하고 표정에는 웃음이 넘친다. 이들은 실제로 인성이 좋은 사람들일까? 아니면 널찍한 벤치에 혼자 않고 점원이 주는 믹스커피가 아니라 내려주는 드립 커피를 마시며 클래식 음악이 나오는 공간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부자들은 착해지기 쉽다고 하는데 뭐 당연한 소리고 어느 정도는 인정한다. 소위 말하는 학군 좋은 학교에서 진상 고객님들을 만나기 쉽지 않다. 겉으로는 매너 있고 교양 있는 언어를 사용한다. 하지만 그들의 진짜 모습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이른바 갑질은 나보다 상대적으로 약자가 나타날 때 무의식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예컨대 “이거 필요 없으니까 너 가져. 너희 집에 이런 거 없잖아” 이 말을 뱉은 학생은 그저 아무렇지 않게 얘기했을지언정 들은 학생은 아무렇지 않을 수 없다. 겉으로는 친구라고 생각하지만 속으로는 너는 나의 도움을 받아야지만 살 수 있는 기생충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양극화가 심해지고 고착화되면서 가난한 동네는 매너 없고 진상이라는 배달의 민족의 댓글보다 거기에 왜 이런 현상들이 나타나고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해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그들은 왜 나빠지고 독해질 수밖에 없는 그런 환경 말이다.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갖는다고 한다. 근데 이 인간다움이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다. 모두 좋은 차 타고 좋은 집에 좋음 음식을 먹으며 해외여행 가는 게 인간다움의 기준이 아니다. 어떤 이는 우리나라에 굶어 죽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되묻는다. 이만하면 잘 사는 나라 아니냐고.. 아마 이런 분들은 잘 사는 기준을 배가 든든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없진 않은가??  공정성을 중시하는 인간의 특성상 빵을 하나 더 먹는 것보다 어떤 날은 마카롱도 먹고 싶은 게 당연한 소원이자 본능이다. 그리고 빵 하나 먹더라도 누군가가 이거 나 안 먹으니까 너 먹어 혹은 버리는 건데 필요하면 너 가져는 아닐 것이다. 인간이 모두가 존엄하다고 헌법에 나오니깐 말이다.


언더도그마 약자에 대한 혐오는 어디서 오는가? 실제 가난한 동네 사람들이 매너가 좋지 않아서 경험담에서 오는 알바의 생생한 경험 후기 일까? 아니면 그 본질을 보지 못하고 껍데기만 본 게 아닐까?..


안타까운 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너무나 쉽게 말로 토해 뱉는 게 인간이 아닐까 쉽다. 그게 약자의 본능이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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