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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티 Feb 01. 2023

이렇게 살아보련다.

우리는 좋아하는 이성과 맺어지는 것이 행복이라 생각한다. 혹은 바라는 것이 이루어졌을 때 그것을 성공이라 말한다. 당사자뿐 아니라 세상 일반에 행복한 일이라는 사고방식이 깔려있다. 하지만 이러한 성공과 행복이라는 달콤한 단어가 주는 폭력도 그림자처럼 우리를 따라온다. 이성과 맺어지지 못한 사람들은 불행하다든가 아니면 적어도 두 사람만큼 행복하지 않다는 의미를 필연적으로 띠고 만다.


결혼을 축하한다는 것은 독신과 동성애자에겐 저주가 되며, 성공을 위해 달려가는 삶이 의미가 있다면 99프로는 지금도 무의미한 삶을 살고 있다. 세상을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두부 썰듯 나눌 수 있다면 정신건강에는 좋을 듯 하나. 바둑처럼 흙과 백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리고 행복한 삶을 위해 사는 게 인생이라면 이미 나는 저 세상 사람이 되고도 남았다. 누가 인생이 아름답다고 말하던가? 혹은 행복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을까? 그 순간을 위해 지금 참아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기엔 영광의 그 찰나의 순간은 너무도 짧다. 하루살이가 하루 날아오르려고 그 인고의 번데기 생활을 견뎠을까? 번데기 안에 있을 때 오히려 따뜻하고 포근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비 오는 날도 해 뜨는 날도 그냥 자연의 순환이고 날씨인데 굳이 인간 기준으로 좋은 날씨 궂은 날씨로 구분하는 것처럼 우리는 그 어떤 ‘틀’을 중시한다. 그렇게 시원하게 나누어야만 미학적이든 심리적이든 깔끔하게 분명하니깐 말이다. 하물며 내가 쓰는 글쪼가리가 분명 돈도 안되고 누군가에게는 별 시답지 않은 시간낭비임에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건 기준을 ‘생산성’이라는 기준으로 바라봤기 때문에 그렇지 못한 것은 쓸데가 없어 보인다. 분명 돈 되는 일을 해야 돌아가는 세상이고 먹고살 수 있지만, 왜 인지 모르게 그렇게 딱 정한 매뉴얼대로 돌아가지 않을뿐더러 오늘의 마음은 어제의 굳은 결심과 또 다르다. 이제는 내일의 나가 대체 어떤 모습일지 두렵다. 같은 사람이라고 보기에는 몸도 찌뿌둥하고 마음도 어제보다 울적한 내가 같은 사람일까?


그래서 이렇게 저렇게 살아야 하고, 아이는 이렇게 키워야 하고, 재테크는 요렇게, 노후보장은 저렇게 하라는 말은 공허하다. 생긴 게 다 다른데 그 기준도 다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이제는 다른 것이 결코 불안이라는 감정으로 넘어가지 않는 단단한 내가 되고 싶다.


흔들리고 부딪히는 게 삶이지만 너는 너도 나는 나 부러워하지도 않고 닮을 필요도 없고 따라 할 필요 없는 그런 독고다이 자유로운 왕따로 살아 보려 한다.

누군가의 칭찬과 질책으로 하루의 기분이 좌지우지되면 안 된다. 슬픔도 기쁨도 내가 직접 감정도 선택하겠다. 어차피 인생은 의미부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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