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1/17
소선영
니체는 우리의 삶들이 반복된다 하였다.
그저 보여주기 위해 지어진 높고 높은 건물 옥상에서 투신자살이라는 사유로 제 인생에 마지막 매듭을 짓더라도, 우리는 천국, 지옥도 아닌 다시 투신자살로 삶의 매듭을 짓기 위해 우리의 두 발이 머물긴 너무 짧은 폭의 코너를 돌아 자신의 이름으로 회귀한다는 것이다.
물론 니체의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는 알 수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코에는 숨이 붙어 있으니까. 그렇지만 정말 만약에 니체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우리에게 처량함을 안겨다 주기 참 좋은 일일 것이다. 천국이라는 사후의 세계를 꿈꾸며 이른 시간에도 머리를 빗고 양치하며 뼈 시려운 겨울 공기를 맞았는데, 그리도 애쓴 이유가 또다시 그 겨울 공기를 맞기 위함이었다니, 본인은 천국에 가기 위해 배신하지 않으며 살아왔다 자부하는데, 그런 본인을 하나님이 배신하셨다니, 50%나 되었던 천국을 향한 동아줄이 그저 헛것이었음을 깨닫는 순간일 것이다.
새 학기에 옆자리 친구에게 말 거는 것조차 두려워 주제넘은 고민에, 시간 낭비하기 딱 좋은 다음 상황까지 상상하는 일. 이는 소심한 마음을 지닌 이들의 필수 요소일 것이다. 선생님은 내게 팀의 주장을 맡겨 주셨지만, 내가 앓고 있는 게으름이라는 질병 때문에 불평하는 이들이 생기진 않을까, 내 피피티가 지루하진 않을까, 이 모든 것을 그저 쪽팔림으로 여기며 하고 싶다는 말보다 오른손이 먼저 앞서 나가 안 하겠다는 의사를 표현할 때, 우리는 선생님도, 짝사랑하는 아이도,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에게 패배감을 느낀다. 한계점은 다른 곳에 있는데, 괜히 옆에 선 친구보다 작은 키가 내 한계점이 되고, 낮은 목소리가 한계점이 되어 버린다. 괜히 반 여자아이들 평균 몸무게에 비해 더 나가는 몸무게가 부끄러워지고, 나의 몸무게라고 매겨놓은 수만큼 못생긴 손톱이 부끄러워진다. 그렇지만 가장 부끄러운 것은 그 모든 단점들을 만들어낸 장본인은 자신이 만들지 않은 진짜 단점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키, 목소리, 몸무게, 손톱 이 모든 것은 소심한 마음을 감추려 자신이 만들어낸 자신만의 단점이다.
그리고, 아니라 부정하고 싶지만 나도 그 수 많은 소심한 인간들 중 하나라는 것이다.
매일 밤 서로를 만나려 하는 두 무리의 속눈썹을 잠시 미뤄두고, 12시가 되기 전, 아직까지 오늘인 낮에 있었던 일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그러자 좋아하는 아이의 눈에 그저 이상함으로, 괴짜로, 찐따로 담기기 싫어 억지로 피해왔던 행동들이 오히려 더 큰 이상함을 불러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를 향해 도움을 요청하는 애타는 목소리를 어찌저찌 귀를 막아 무시한다던가, 나와 정반대에 있는 친구를 질투에 그을린 표정으로 쳐다본다거나, 모두 나의 소심함을 들키기 싫어 하나하나 지어왔던 표정이며 몸짓이었지만 그 손끝, 그리고 제멋대로 날리는 머릿결 하나하나에서 티가 나는 소심함은 나만 몰랐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걸 느낀 나는 애써 참담한 나의 실체를 무시하려 뒤늦게 양들의 수를 세곤 했지만, 그 처량함과 모멸감은 양들의 하얀 털 위로 비추어져 어떻게든 내게 전해오려 고군분투했다.
그런 일상들이 옷에 배긴 고기 냄새처럼 날 떠나갈 생각없이 나의 상스러운 욕들을 쥐어짜내곤 했다.
그리고 그런 일상에 질릴대로 질려버린 나는 나만의 좌우명을 만들어 세웠다.
여차하면 죽자는 좌우명, 물론 말 그대로 진짜 죽을 생각은 없었다.
흔들다리라는 이름이 민망할 정도로 아주 미세한 움직임만을 선사하는 다리 위에서도 추위가 아닌 살고자 하는 그 욕구로 인해 옴 몸을 뒤틀어 떨어왔던 나인데, 어떻게 자살이라는 것에 손을 댈 수 있겠냐는 말이다.
나만의 좌우명을 만들어 세운 뒤 여러 방법들을 생각해 보았지만, 떠오르는 것은 양팔이 붙잡혀 도착한 정신병원 뿐이었다. 10살이었지만, 본능적으로 느꼈었던 것이다. 정신병원에 가면 그 악명 높은 병원 밥을 먹어가며 강제 다이어트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말이다.
실용적이지도 못하며, 실현하지도 않을 좌우명이었다. 그치만 죽음보다 소심한 내 성격이 더 증오스러웠던 지난날의 나는 소심한 내 성격을 고치려 무엇이든 해야만 했다.
물론 바로 그 좌우명의 효과가 나타났던 것은 아니다. 10년간 자리 잡고 나를 지배했던 소심함을 단번에 내쫓기란 불가능했다. 내가 할 수 있던 것은 소심함의 목소리를 줄이는 것 정도였다. 도움을 요청하는 친구의 손을 잡아주기에 앞서 소심함의 목소리가 줄어들자 내 좌우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모하고 철없는 생각이었지만 내가 소심함을 무시한 대가를 죽음이라는 블랙홀에 던져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직까지 살아있는 나를 보았을 때 나는 비로소 정답을 얻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망설이고 고민해왔던 모든 일들은 사실 망설일만한 영향력이 없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저 소심함이라는 브레이크 때문에 나는 너무 자주 멈춰왔음을 말이다.
난 니체가 우리의 삶이 반복된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한 이유도 이와 비슷할 것이라 생각한다.
때로 우리 인간은 너무 많은 생각의 관문을 거친다. 그렇지만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그 많은 생각들이 대게 정말 쓰잘때기 없다는 것에 있다. 제 이름을 큰소리로 외치는 자신의 욕망을 무시하고 다른 이의 이름을 부르는 타인의 욕망을 쫓아 달린다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절망이라는 단계에 다다른다. 어쩌면 정해져 있던 하나의 각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제 옷이 아닌 옷을 입었으니 안 어울리는 것은 둘째치고, 옷이 자기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기라도 하듯 투둑 툭 거리며 찢어지려 하기까지 하니 말이다. 오래된 기계일수록 더 많은 과부하를 불러오는 것처럼, 우리의 생각도 때론 과부하가 온다. 그 과부하로 인해 자칫 오염 된 상품을 찍어낼수도 있다. 소심함을 숨기려 거짓된 단점들을 꾸며내던 나처럼 말이다.
마냥 절망적이기만 한 죽음을 니체는 마치 기회라도 되는 양 말했다. 그저 사후세계의 천국과 지옥만을 말하던 하나님과 다르게. 많은 생각을 해도 결국엔 뜨거운 눈물에 대해 신세한탄만 할 것이라면 그 많던 생각을 될 때까지만 이라도 지워버리는 용기를 가져보는 것도 마냥 철 없는 도전은 아니지 않을까
꿈이라는 것에 있어 나 또한 할 말이 많다. 물론 지금도 어리지만, 지금보다도 더 어렸던 과거의 나는 꿈이 마치 사후세계 미리보기인 것만 같았다. 꿈이라는 나만의 비밀공간에서 나는 때때로 오직 나만을 비추는 조명을 뒤로하고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잘생긴 연예인 남친과 비밀 데이트를 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아마 그 전날 나는 엑소 카이와 블랙핑크 제니의 열애설에 대해 뉴스에서 보았을 것이다. 물론 어떤 날은 살인마가 칼을 들고 쫓아오기도 했었다. 그리고 내 기억엔 그날 무서운 이야기 몰아보기라는 유튜브 영상을 보았을 것이다.
천국에 가면 이곳에선 맛보지 못했던 행복을, 지옥에 가면 이곳에선 경험하지 못했을 불행을 내 살갗으로 직접 느낄 것이라 읽고, 듣고, 보았으니 때론 행복을, 때론 두려움과 불행을 보여줬었던 꿈이라는 공간을 나는 천국과 지옥이 오가는 사후세계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물론 내가 겪었던 사후세계가 진정한 사후세계가 아닌 그저 꿈이었다는 사실에 내가 보았던 행복이 사후세계엔 없을 수도 있다는 허망함과, 내가 보았던 불행이 사후세계엔 없을 수도 있다는 안도감이 나에게 불어왔다. 특기라곤 거짓말밖에 없던 내게 그 감정은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그리고 그 후로 내겐 하나의 습관이 생겼다. 꿈을 기록 해 두는 것. 어느 날은 김은숙 작가의 시나리오만큼 탄탄한 구성의 꿈을 꾸었다. 마치 소용돌이 같았다. 말로, 글로도 다 표현해내지 못할 만큼 강한 무언가가 내 몸 전체를 훑고 지나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약간의 눈물이 나의 눈 양옆에 위치한 삼각 존에 고였다.
나는 곧바로 일어나 마치 영유아 때처럼 발에 살이 붙은 것 마냥 비틀비틀한 걸음으로 노트와 펜을 잡아 적었다. 창밖에서 나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햇빛을 무릅쓰고 난 3장 빼곡히 꿈을 기록했다. 나를 낳은 나의 엄마조차도 읽어내지 못할 글씨체였다. 하지만 난 그래서 더욱 좋았다. 나만 읽을 수 있는 진짜 나만의 이야기였으니까. 그 후, 그 이야기를 친구에게 말했다. 물론, 꿈이 아닌 꿈을 처음 기록해본 나의 이야기를. 그러자 돌아온 대답은 나의 예상을 지나치지 않고 맞아떨어졌다.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 그것이 그 친구가 내게 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대답이었다. 그리고 난 그 눈빛을 기분 나쁘다는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 난 그 눈빛을 즐겼다. 세상 사람 모두가 아닌 척 하지만 실은 모두가 자신은 특별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나 역시 그렇다. 그리고 그 이상하다는 눈빛은 이상하게도 나의 특별함을 인정해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나조차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는 나의 가장 솔직한 구역에서는 그 눈빛을 아끼고, 애정 하는 듯했다. 그렇지만 그 눈빛을 탐내기에 꿈을 쓴 것은 아니었다. 나는 특별함을 원하지만, 그에 걸맞지 않게 나에게서 특별함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여느 10대 청소년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나는 특별함을 갈구하는 강한 마음만큼이나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갈구했다. 그리고 특별함에 목마른 나에게 꿈이라는 것은 나의 목마름을 해소해 주는 듯했다.
외모가 같아도, 이름이 같아도, 나이가 같아도, 혹여 그 모든 것이 같다해도 세상을 보는 시점, 그리고 하나, 하나 쌓여 온 경험 들 만큼은 분명히 다를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나의 꿈은 특별하다 말하는 것이다. 꿈은 보고, 듣고 겪은 바를 가장 솔직하게 나타내어 내게 다가온다. 비록 내가 특별하지 못하다 말해도, 내 꿈은 특별하다. 내가 그 꿈을 기록하려 한 자, 한 자 글씨를 새겨나갈수록 나만의 특별한 공간은 더욱 튼튼해져 가는 것만 같았다. 한 획, 한 획 그어 갈수록 그 모든 획 들이 꿈이라는 공간의 뼈대가 되고, 문이 되며 다른 이가 들어오지 못하게 막을 자물쇠가 되어주었다.
어쩌면 또 다른 눈을 가진 이의 시점에서는 할 짓 없는 아이의 미련한 시간낭비라 말 할 수도 있다. 물론 크게 반박할 수도 없다. 고개를 비틀어 살짝 기울어진 시점에서 보면 크게 틀리지 않은 말이니까. 그렇지만 우리가 서로를 올곧은 시선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강아지와 인간에게서 알아낼 수 있었다.
인간끼리 통하여 소통하는 언어를 강아지는 이해할 수 없듯이 인간 또한 강아지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생각은 곧 고민과 걱정이다.
내가 알뜰살뜰 생각하고 생각하며 공기와 공생한지도 어언 14년이 되었다. 앞으로 살아갈 시간들을 떠올리면 그저 한숨만 나오는 시간이지만, 그래도 내 나름 많은 생각을 했다고 생각한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학교 의자 위에 앉아 생각하기도 했고, 엄마가 해 주신 어묵볶음에 젓가락을 가져다 대면서도 생각했다.
간단하게는 저녁 밥을 먹고 해야 할 숙제를 어떻게 미루는가에서 시작해 죽음과 관련된 나름 심오한 주제들까지. 한정된 식습관과는 다르게 다양한 장르를 생각했다.
일명 왕 할머니라 불리는 점집 할머니도 내게 생각이 많은 아이라 말씀해 주셨다. 물론 그때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멋쩍은 웃음과 함께 뒷머리를 긁어 댈 뿐이었다.
가장 행복한 이는 현재를 사는 이라고 생각하고 말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이 생각을 변함없이 가지고 살아간다.
가장 행복한 이는 현재를 살아가는 이.. 가장 행복한 이는 현재를 살아가는 이.. 매 순간 되뇌이면서 말이다.
그렇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방법은 책상 위에 놓인 달력이 2번이나 넘어 갔지만 알아내지 못했다. 행복해지기 위해선 현재를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이제 알겠는데, 현재를 살아가는 방법은 도무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요리에 필요한 레시피는 준비 되었는데 재료가 없는 상황처럼 말이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레시피를 알아내기 위해 깊은 생각의 구렁텅이에 빠져버린 내게 행복한 날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이젠 작년이 되어 버린 2022년 크리스마스 날 별다른 일 없이 해가 져버린 25일이 내겐 많은 원망을 샀다. 괜히 애꿎은 신발에게 화풀이라도 하는 듯 투박한 손길로 신발을 벗어 던졌고 언제나처럼 패딩 지퍼를 내리며 거실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자 나의 눈은 노란 불빛으로 가득 찼다. 집은 추웠지만 크리스마스 트리의 전구는 왜인지 모닥불처럼 뜨거웠고 입고 있던 패딩을 벗었지만 추위라는 단어는 원래 몰랐던 단어인 것처럼 내게 있어 지워졌다.
산타는 없다는 것을 말한 이후로 크리스마스 선물은 해주지 않으셨던 부모님이셨다. 그런데 그날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내 발 앞에 트리와 속이 꽉 찬 선물 포장지가 놓여있었다.그리고 그 순간 난 정답을 알 것만 같았다. 해는 자취를 감췄고, 집의 불은 꺼져 있었기에 나를 반기는 것은 트리를 감싼 전구에서 흘러나오는 노란 불빛 뿐이었다. 그리고 전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환한 불빛에 압도당했는지 차마 아무런 생각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긍정적으로 끝나는 생각은 어쩌면 우리에게 꼭 필요한 좋은 양분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느낌표와 마침표를 찍어가며 굳은 확신을 보이지는 못하겠다. 지금까지의 난 긍정적인 생각을 마주해 보지 못했으니까.
한국 청춘 드라마의 필수 장면인 짝사랑 상대에게 하는 고백은 남의 멸시와 조롱을 받을 만한 행위도 아니고, 그렇다고 범법 행위는 더더욱 아니다. 그렇지만 늘 고백을 마음먹고 하는 생각의 끝은 자기 비하와 눈에 보이게 나태해진 행동으로 끝난다. 괜히 전신거울 앞에 서서 없는 살까지 만들어가며 꼬집고 그 꼬집음 때문인지 무엇인가에 아파하며 슬퍼한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자신의 욕망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다른 사람의 욕망을 보고 아무런 목적도 없이 달려갔어야만 했던 우리들은 절망이라는 단계에 다다르고 배우지 않았어도 되었을 것을 배운다. 망설임과 멈춤이라는 것.
그로 인해 한창 달려가야 할 시기에 맞춰 달리고 있는 우리들을 생각은 불쑥 나타나 우리를 막으며 온갖 악담을 늘어놓는다.
한밤의 길고양이처럼 일종의 경계 태세라 할 수 있겠다.
꿈에서 깨고 싶지 않아 했던 이유는 물론 새로 바꾼 매트리스의 포근함 탓일 수도 있지만, 생각이 나타나는 현실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다. 꿈속에서는 마치 물속에서처럼 쉽게 쉽게 팔을 들어 올릴 수도 빨리 달릴 수도 없다.
그리고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다. 보이기만 할 뿐 냄새도, 맛도 아픔도 느끼지 못한다. 그저 흘러가는 물에 몸을 맡긴 것처럼 그 꿈속 이야기 흐름에 우리의 뇌를 맡긴 것이다.
거위 털 패딩과 피부까지 뚫고 전해져 오는 추위는 그 자체만으로도 많은 이들의 짜증을 산다. 그렇지만 쉽게 짜증을 내고 쉽게 식는 것만큼 단순한 인간들은 그 잔혹한 추위에 온갖 짜증을 부리고도,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느껴지는 핫팩의 뜨거운 온기에 또 금방 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오므리고 목적지를 향해 요란한 발걸음으로 뛰어간다. 겨울이 싫다고 여름을 기다리는 아이들은 눈이 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겨울을 찬양한다.
어제 탄 지하철에선 많은 사람들이 짜증 섞인 숨소리를 내며 자신의 기분이 상했다는 것을 표출하고 싶어 했다. 물론 나도 그 많은 사람들 중 한명이었다. 금방 갈 거라는 한 줄기의 희망을 잡고선 애써 잔뜩 구겨진 표정을 숨기려 휴대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마주한 인스타 언니들은 언제나처럼 자신의 명품 가방을 자랑하고 있었고 좋아요로 가던 나의 엄지는 이내 그저 아래서 위로 쓸어 올리며 일명 눈팅만 할 뿐이었다. 그러던 중 지하철 민폐족의 범주에 속하는 백팩충이 나의 등을 치는 일이 생겼다. 하파터면 손잡이에 얼굴을 박을 뻔한 나는 어떤 사람인지 얼굴 좀 보자는 심정으로 고개를 돌려 그 백팩충을 마주했다.
그렇지만 당장이라도 허리춤의 커터칼을 뽑아 들 기세였던 나는 이내 마스크 속의 온화한 미소를 지을수 밖에 없었다.
고개를 돌려 마주한 그 백팩충은 인스타에서만 보였던 일명 존잘남이었던 것이다. 얼굴과 같이 심성도 착한 그는 죄송합니다 라며 인사했다. 집어 들려던 커터칼은 잠시 넣어두고 괜찮다며 멋쩍은 웃음을 표하는 나였다.
긍정적임과 부정적임은 아주 간단한 일로도 그 위치가 바뀌곤한다. 핫팩 하나에, 고작 눈이라는 것에 웃음을 짓는 우리들 이기에.
니체의 말대로 삶이 반복되고 현재가 영원하다면 현재를 긍정하고 제 삶을 긍정해야만 한다. 영원히 반복될 생각을 더럽히지 말아야 된다는 것이다. 설령 반복되는 삶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똑같은 현재가 영원히 반복된다고 가정할 수 있을 정도로 현재를 긍정하고 자신의 삶을 긍정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