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지호
나는 가끔 평생을 사는 꿈을 꾼다. 추하게 죽는 삶이 싫어서,화려했던 과거의 모습보다 퇴보한 나의 거울 속 모습에 어느날 확 목을 메달고 죽어버릴까봐 말이다. 중국의 진시황도 죽음이 두려워 불로초를 찾아 다녔지만 결국은 진시황의 꿈조차도 빛나지 않았다. 인생이란 상점은 내게 시간이란 담보로 꿈을 빌려준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꿈을 꾼다고 하는 것일까. 내가 꾼 꿈 때문에 사채업자들이 빛바랜 나의 삶에서,빚만이 나의 삶에서 남은 것들을 가져가려 보챌까봐서 나는 죽음이 두렵다. 그러나 두려움에 떠는 시간동안 남들이 하라는 것조차도 못 미루는 나인데 어떻게 죽음을 미룰 수 있겠는가. 어거스 워터스(잘못은 우리별에 있어)가 죽음을 앞두고 담배를 피우는 것처럼 나또한 반항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는 단지 병이 걸린 노견에 불과했다. 살마라노가 발라주는 연고가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나는 희극을 연기해왔던 것 같다. 비록 대본이 끝나고 막이 내리는 순간. 조명은 꺼지고 암흑같은 비극으로 바뀐다는 사실은 연고를 발라주고 있는 살마라노조차도 알고 있을 것이다. 반항을 하기에는 늙은 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도망칠 수도,기도할 수도,반항할 수도 말이다.
제멋대로 하는 것이 죽기 직전의 사람들의 대표적인 행동이라고 한다. 나같아도 당장 내일 죽는 다면 학교도 가지 않고 책도 피지 않을 것이다. 또한 평소 싫어했던 사람에게 욕도 할 것이고 내가 평소에 좋아했던 사람에게 고백도 해보고 싶다. 죽음이라는 것은 내가 짊어지고 있던 모든 것을 털썩,내려 놓으라고 한다. 반대로 삶은 털썩 주저앉고 싶을 때도 의자에도 앉지 못하게 한다. 의자가 너무 푹신해보여서,다리가 아파서 의자에 앉는 순간 또 살고 싶다는 생각의 연속이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허횡된 꿈을 품고 사는 존재인지 또 한번 인식하게 한다.
운명,결국 인간은 죽게 되어 있다. 늘 빛나던 태양도 때가 되면 달이 어둠으로 빛을 가리고 그 어둠 속에서 우린 아무도 모르게 죽어간다. 내가 죽음이란 병에 걸리면 난치가 되어 뫼르소의 어머니처럼 나이가 들어 누군가의 짐덩이가 되어 종량제 봉투에 버려질 거고 또 종량제 봉투가 좁아서 뚫고 나온 다면 내게 예정된 죽음보다 빠른 죽음을 맞게 할 것 같다는 불안감이 나를 엄습 해온다. 시한부나 암환자에게 죽음이라는 것은 마치 절벽 위에 혼자 자란 꽃 한송이를 꺾는 것과 마찬가지다. 힘들게 뿌리내려 만개한 꽃은 봄철의 벚꽃처럼 추위에 떨며 기다린 시간과 벚꽃이 지고나서 견뎌야할 무더위가 무색하게도 사람들은 한장의 사진을 찍고서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이번 봄에는 벚꽃이 예쁘게 안 폈네"하며 평가를 한다. 이 얼마나 허황된 인생인가! 그래도 나는 잠을 청하지 않았다. 내가 잠을 청할 때면 난 의자에 앉고 나서 잠에 들 것이다. 안 졸린 줄 알고 전력으로 질주하다가 결승선 코 앞에서 쓰러지듯 잠에 드는 것은 나의 노력의 결과가 미완주라는 소리가 되는 것 같아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저 내가 죽으리라는 것을 알고 꿈을 꾸고 싶다. 의자에 앉아서 사람들에게 꿈을 꿔주고 싶다. 불같이 탔다가 싸늘해지는 성냥처럼 사는 인생은 절망은 있을 지언정 후회는 없을 것이다. 화려했던 벚꽃 사진 한장을 남겼기에,그 사진은 평생 누군가의 가장 소중했던 시간으로 변치 않고 벽 한면을 채워줄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