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과 실현

by 제이티

예언과 실현


홍지호


사람들은 보통 거짓말은 나쁜 것이라고들 한다. 진실을 꾸며서 말하는 거짓은 가려진 진실을 대신하여 자신이 진짜 진실인 척 또 다시 거짓말을 시작한다. 이것을 두려워 하는 사람들은 거짓을 악으로 단정 지으며 후이넘 세계또한 있지도 않은 것을 횡설수설 떠드는 걸리버를 보며 특이한,내지 야호족과 동일시 할 정도로 거짓된 이를 보며 불결하고 나쁜 짓이라며 사회에서는 단정 짓는다. 그럼에도 우리가 거짓에 열광하는 이유는 소설책에서 자주 보인다. 소설책이나 영화와 같은 것들은 모두 사실보다는 자신의 뇌에서 나온 이야기들이 많은데 해리포터 시리즈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사람들은 거짓된 '익스펙토 패트로눔'이라는 문장 하나에 열광한다. 그 이유에는 당연히 이 주문으로 해리포터의 세계관뿐만이 아니라 나의 세상까지도 휘몰아친 천둥을 몰아 내고 밝고 하얀 것들만이 있게끔 만들어 줄 것이라는 헛된 희망이 우리들을 지탱해주기 때문이다. 그것 외에도 거짓은 믿음으로 직결되기에 우리들은 믿는 다는 것 자체를 거짓으로 규정한다. 내가 시험에서 100점을 맞을 꺼라는 믿음으로 나는 자료의 정리와 해석의 문제를 풀지만 정작 나오는 결과는 미래로써 눈에 보이지 않을 뿐더라 오늘이 지나지 않는 한 나는 100점을 맞을 지 10점을 맞을 지는 알 일이 없다. 그러나 이는 거짓이라는 리본 하에 예쁜 선물 상자를 우리들의 크리스마스 트리 안에 두었다. 이러한 것들로 인해서 문명이 개발되고 종교가 생기며 발전을 이륙한 것이 현재 우리들의 삶이다. 산타가 있다는 허황된 믿음으로 트리를 꾸미고 캐롤을 부르며 산타가 오기 전에 일찍 잠에 들 듯이 말이다. 이러한 믿음은 거짓말, 더 정확히 말하면 욕망에서 온다. 욕망은 12월 말에 늘 그랬듯이 쌀을 먹고 김치를 먹는 것의 문제가 아닌 쌀 보다는 밀가루를 먹으며 늘 입던 무채색의 검정 옷이 아닌 빨간색으로 된 옷을 즐겨 입는 것또한 우리들의 욕망이다. 푸른 사자 와니니에서 사자들은 자신이 배가 부를 때는 지나가는 사슴을 공격하지 않지만 유독 와니니만큼은 바람을 가르며 사슴의 뿔을 잡고 뜯는 모습을 보는 사람들의 반응 때문이다. 즉 인정욕구(욕망)을 위해서 행동하는 것은 당연한 사람들의 이치이다. 낙제만 하지 않아도 되는 시험에서 굳이굳이 100점을 맞으려 노력하는 인간들의 모습은 생존만 하면 되는 초원 위에 우뚝 솟아 있는 육식 동물들과 오늘도 살았다라며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초식동물은 절대 이해하지 못한다. 이것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했던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에 속할 것이다. 고양이나 강아지가 쓰다듬어주거나 간식을 주면 배를 발라당 까며 쿼카를 만져주며 사진을 찍으면 애교를 떨며 울음소리를 내는 동물들은 모두 욕망이 있는 생물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거짓(욕망)을 우리는 왜 지키고 있는가? 우리들이 나눈 모든 이야기들과 바다 위에서 헤엄치는 동물들의 차이점은 우리들은 바다에서 어떻게 해야 서핑을 하며 바다를 더 끝내주게,소문이 어떻게 해야 날까를 생각하지만 수생동물들은 누구보다도 처절한 파도와의 싸움을 빨간 피가 아닌 파란 물과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거짓들은 우리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애들이 심하게 칭찬하면 그것은 칭찬이라는 단어로써 퍼붓는 비난이라는 것을 알 정도로 우리들은 거짓된 단어와 뜻들을 잘 알고 있다. 규칙이나 법,도덕이 모든 것들이 상상의 질서라는 거짓들로써 우리를 억압하고 있다는 것조차도 모두가 알 것이다. 그럼에도 거짓은 나쁘기에 거짓을 진실로 바꾸라는 선생님들의 말씀은 선생님들조차도 하지 못하고 있다. 매번 종이 쪼가리 걱정을 하시던 선생님이나 늘 핸드폰의 그래프만 바라보며 희비가 교차되는 사람들을 보면 결코 거짓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독일제 강력 접착제로 붙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거짓말이 살아졌을 때는 후이넘의 세상처럼 있지도 않은 것에 대한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을 것이며 당근이 아닌 목초지의 풀을 먹고 햇빛이 잘 드는 밖에서 잘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제로 나는 자연인이다에서 나오는 사람들 대부분은 산과 나무가 곧 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고 핸드폰이나 컨테이너 박스보다는 흙으로 된 침대를 애용하신다. 이것은 현대 사회에 지치신 사람들이 택하는 현실도피의 방식일 뿐 여전히 우리들은 거짓을 믿는다. 거짓은 단지 "옆반에 누가 누구 좋아한대!" 라는 소문에서 그치는 1차원적인 것이 아닌 살인을 금지하거나 어른들에게는 존댓말을 쓰며 '에게는'이라는 말 대신 '께'를 사용하라고 지시한다. 이것들이 우리들의 사회를 지탱하며 언제든지 마음에 안 들면 죽여버리는 것은 거짓이 아닌 진실을 한번 맛본 사람들만이 가능한 짓인 것이다. 그와 동시에 진실은 불편하다. 진실이 가진 유일한 단점은 기다림이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튀어 나올지 모르는 진실과 진심은 바쁘디 바쁜 현대 사회에서는 저 멀리에서 나와 정류장으로 뛰고 있는 한명의 승객을 하나하나 챙기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들은 거짓된 희망과 평등,자유를 꿈꾸고 그것들이 우리 삶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거짓말이 좀 더 편리하고 우리에게 유리한 방향이기에 우리들의 말에는 거짓말이 섞이는 것이다. 내가 학교에서 이야기 하는 '부럽다'는 진심으로 이야기 하는 부럽다가 아닌 '짜증난다'의 의미를 내포한 것처럼 한사코 우리들은 진실을 진심 그대로 받아드리지 않는다. 이러한 거짓들은 점점 우리들을 병들게 만든다. 설령 내가 진심으로 부럽다라고 이야기했다고 해도 결국에는 받아드리는 사람이 참인지 거짓인지 사리분별을 해야 하며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불신은 이미 우리들을 보잘 것 없는 야호로 만들어 버렸다. 테이크원의 정규 1집에서는 이런 가사가 나오는데 "나를 똑바로 봐 줬으면 해"라는 가사는 현재 사회에서 모든 것들을 왜곡하며 인지하는 사회에게 가하는 일침이였다. 그래서 테이크원을 비롯한 대부분은 거짓이 없는 후이넘의 세계를 가고 싶어 한다. 걸리버또한 처음에는 아니였을지 몰라도 그것은 서서히 바뀐 것이 아닌 내면 깊숙히 꽁꽁 감춰놨던 진실을 향한 갈망이 후이넘의 세계를 통해 사회라는 족쇄를 풀며 나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후이넘의 세계는 유토피아에 가장 근접한 곳일 것이다. 노예 취급을 당하는 야호에게 3D 업종,더럽고 어려우며 위험한 것들을 맡기며 그 외의 사람들은 모두가 온전항 행복을 통해 행복마저 공유하는 사회를 이륙했기 때문이다. 후이넘의 사람들은 야호 빼고 모두가 평등하며 전쟁을 하거나 말다툼을 하지도 않는 우리의 영원한 워너비인 평원일 것이다. 그러나 그 초원에서 일어난 말들은 결코 유토피아를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는 한다. 마치 공산주의를 보는 듯 하다. 마르크스가 주장한 유토피아에 가장 가까운 이상적인 국가들인 소련(러시아)과 북한은 지금 어떠한가. 신뢰는 없으며 모두가 모두의 적이다. 이것은 곧 거짓이 없고 진실된 사람들만이 모인 것임을 뜻한다. 거짓이 없어진다면 모두가 행복해질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웃기는 소리이다. 우리의 내면의 조각가들이 겨우겨우 거짓말이라는 조각칼을 가지고 깎아놓은 사각진 돌이 아닌 이리 튀고 저리 튀며 데굴데굴,점점 마모되어 가는 돌들이 우리들 보다 더 평화롭게 만든다. 반면 거짓이 없으면 바로 나의 진심이 나올 것이다. 학교에서도 하루에 수백번씩 하는 것이 거짓말이다. 학교 급식의 맛이 어떠냐는 영어 선생님의 질문에 "진짜 맛있어요! 최고의 급식"이라고 이야기 한 것은 당연히 거짓이지만 만약 있지도 않는 것이라고 치부하고 이야기 한다면 "진짜 맛 없어요,저희 학교에는 소금과 설탕이 없고 후추로만 간을 하나요?"라고 말했을 것이다. 때때로 진실은 거짓만도 못할 때가 있다. 믿음이 없는 유토피아는 유토피아가 아닌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는 'disappear location',즉 사라질 장소라는 것이다. 우리들이 말하는 유토피아는 유토피아라기 보단 사라질 장소에 가깝다. 도망친 자에게 낙원은 없다. 단지 나를 낙원으로 속일 뿐이다. 걸리버에게 후이넘이 이랬을 것이다. 거짓이 없고 속임수가 없는 후이넘들인 줄만 알았겠지만 사실은 유토피아를 표방하며 좋게만 생각하게 시키는 거짓 중에 거짓이였던 것이다.


우리들이 만든 법과 규칙들에 대한 불만은 늘상 있어 왔다. 거짓을 향한 거짓된 분노다. 학급에서 정한 뛰지 않기,학교 폭력 금지는 선하고 당연한 것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어느 때는 지각을 해서 뛰어야 할 수도 있고 정말 짜증나는 애를 죽도록 주먹을 내지르고 싶을 때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를 억누르는 규칙의 정체는 앞서 말했듯이 거짓이다. 이것이 진실의 무서운 점인데 앞선 후이넘에서도 조금만 더 진실에 가까운 말들이였다면 거리낌 없이 진실을 행사했을 것이다. 우리들은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말하듯이 인간들의 욕망인 안정과 평화를 위해서 계약한 것으로 그것들의 제 1조 1항은 민주주의 공화국이 아닌 거짓공화국이였어야 했다. 이처럼 거짓들에는 우리를 짜증나게 할 수도 있지만 거짓으로 인해서 우리가 안전해진다면 우리들의 불쾌와 분노를 지불하고 안전과 평화,자유를 얻은 것만 같아서 꽤 이득을 본 거래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28일 후에서 나온 것처럼 좀비들이 덮친 세계에서는 좀비에게 물리지 않기 위해서 주위 사람들을 떠밀고 자신들이 안전하기만 원하는 진실인 생존에 더 접근한다. 마치 펭귄이 낭떨어지에서 바다가 위험한지 안 위험한지 확인하기 위해서 다른 펭귄을 밀치는 것처럼 말이다. 동물들이 모두 생존을 위한 생물들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 인간은 생존을 모두가 약속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 하다. 그렇다면 이 거짓에 대해서 우리들은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나라고 묻는다면 칸트가 이야기 하는 실천이성을 통해서 해야 한다. 내가 지껄인 100점을 맞겠다,전교 5등 안에 들겠다는 실현 되기 전까지 허풍이고 거짓된 희망에 불과하지만 내가 진짜 100점을 맞으면 그것은 거짓이 아닌 진실이 되고 허풍이 아닌 예언이 되는 것이다. 실천이성은 의지와 행동으로써 실현되는데 나는 열이 39도까지 오른 상황에도 최고가 되기 위해서 다시금 글을 쓴다. 이것이 내가 나의 거짓에 대항하는 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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