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지호
'주위에서 잘한다 칭찬받을 때마다 좋은 게 아니라 불안했어. 더 잘해야 하는데, 더 좋은 성과를 보여 줘야 하는데. 모든 게 행운이었다는 두려움이 밀려들었어. 사실 나는 실력도 없는데 우연찮게 이 자리에 선 건 아닌가? 이 모든 결과는 내 것이 아닐지도 몰라. 언젠가 사람들이 진짜 나를 알아 버리면 실망할 거야. 그럴 줄 알았다고 야유를 보내겠지. 이런 생각만 하면 마음이 초조해져서.” “그래서 잃어버렸는지 몰라. 꼬리에 너무 많은 눈을 달아 버려서. 그 수많은 눈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거야.'
보통 사람들은 입상을 하면 인정과 환호의 말보다는 야유와 언젠가는 추락할 것이라는 저주에 가까운 말들을 퍼붙는다. 그 사람들은 점차 시야에서 흐려지고 결국에는 거울 앞에 서있는 나 자신이 보인다. 솔직히 내가 이룬 것들이 나의 덕이라는 생각은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 그저 운이 좋아서,또는 내가 잘한 것이 아닌 남이 못해서라고 생각하고서는 눈을 붙힌 뒤 이불을 덮었다. 그러고는 중학교 2학년 사촌형의 시험이 전과목 올백을 맞았다는 말에 부러워하는 감정과 열등감이 동시에 터져나온다. 앞에서는 "오 대박 형 열심히 했나봐"라며 인정해주고 환호해주는 단어들을 사용하지만 실상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한마리의 작고 비겁한 새가 되는 것이다. 보통 작은 새들은 자신보다 더 작은 벌레들을 잡아 먹거나 떨어져서 죽은 시체들을 먹고 살고는 한다. 이것은 독수리가 아닌 수리또한 마찬가지였다. 수리는 남에게 인정을 받기 위한 삶만을 살아왔다. 이것은 단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가 비추고 있는 나 자신이 거울에 비춰졌을 때 볼록거울이 아닌 오목거울로써 더 크게 보이고 장엄하게 보이기를 바란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멀어지고 멀어질 수록 거울이 못 담을 정도로 커지는 것이 아닌 거울의 안으로 들어와 원래의 나보다도 작아진다. 그것이 과학이고 이것이 우리들의 삶이다. 수리는 sns에 감성적인 글귀와 예쁜 사진을 올리고는 한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멋진 아이라고 하지만 수리는 늘 그것을 경계한다. 언젠가는 자신이 멋진 아이에서 추한 아이로 바뀌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매우 경계한다는 것이다. 수레바퀴 아래서의 한스또한 마을에서 한번도 나온 적 없는 천재,영재라고 추앙받고 신학교에 가서는 성적은 수,A급이였지만 점점 A에서 B로,B에서 결국에는 F까지 떨어지고 성적이 '가'가되자 튼튼한 나무를 찾고 밧줄을 걸며 이제는 목을 매달 뿐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어쩌면 수리의 영혼또한 자살을 한 것이 아닐까. 나 자신이 기대하는 자신의 모습이 아닌 탓에 영혼은 결국 튼튼한 나뭇가지를 찾아버린 것이다.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마이클 샌델은 이렇게 말한다. '지금 그들은 살인보다 자살로 더 많이 죽어간다. 이런 병리학적 상황을 넘어 심리학자들은 이 세대 대학생들의 보다 미묘한 정신적 문제점을 찾아냈다. 완벽주의라는 숨은 전염병이다.' 라고 말이다. 우리들은 늘 누구보다도 잘해야 한다라고 학습을 받는다.
그러나 우리들은 늘 잘할 수는 없다. 나또한 초등학교 때 최우수상을 받고 나서 더 잘할 거라고 오산시에 국한된 것이 아닌 전세계로 뻗어 나갈 것이라는 주위 어른들의 응원을 받았지만 실상은 오산중학교에서도 금상은 커녕 은상을 받은 것이다. 수리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우리 모두는 무리 속의 기류에 몸을 맡길 수는 없을 지언정 잔류는 하고 싶기에 오늘도 어김없이 평판을 위해서 나 자신의 육체를 혹사 시킨다. 실제로 오늘 나는 매우 피곤했다. 시험을 보고 난 후에 집에 돌아와서는 가루가 되어 납골당에 묻혀있는 사람들보다도 더 죽은 사람처럼 있었다. 도어락 비밀 번호를 누른 뒤에 가방을 벗지도 않은 채로 답답한 교복과 목 끝까지 채운 단추의 셔츠임에도 나는 익숙하다는 듯이 누워서 잠을 청한다. 일어나보니 8시였고 나는 어느 인터뷰에서 성실하다는 말을 듣기 위해서 9시 56분인 지금에도 키보드 타자를 치고 있다.
나나에서 한수리는 독수리 취급을 받는다. 그러나 정상으로 올라온 한수리는 독수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이 하늘 위를 두려워 한다. 다만 한수리는 맨 꼭대기에서 아래로 추락이 아닌 착륙을 하며 맨 위의 푸른 하늘만이 낙원이라는 생각은 버리게 되었다. 낙원은 하늘 위에 있는 천당이 아닌 우리들의 삶에서 찾을 수 있는 삶의 안식처니까 말이다. 어쩌면 수리는 독수리에 어울리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다. 독수리는 늘 혼자 다니고 혼자서 큰 날개를 핀 후 하늘을 가른다. 그러나 수리는 큰 날개에 자신이 가려지기를 꺼려한다.
날개보다는 나에게 집중해줬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한수리는 날개를 떼고 인도를 걷는다. 벽돌로 이뤄진 인도는 한수리 자신이 인도한 길인 것이다. 'my way' 결국 자신만의 길을 찾은 수리는 남 부럽지 않은,남들이 부러워 하지 않을 삶을 향해서 두 다리로 성큼성큼 걷는다. 이것은 마치 단역만을 연기하던 박성웅이 신세계 이성구로 우뚝 솟아난 것처럼 조연에서 주연으로,그리고는 지금 들어오는 주연 캐스팅에도 거부하며 자신이 직접 영화를 써 내려 간다. 자신만의 영화. 그 영화의 제목은 아마도 한수리이지 않을까. 결국에는 연기하는 것보다 나 자신을 보여주는 것이 더 행복하다는 것을 깨달은 독수리는 날개를 접고 땅을 밟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