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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티 Jun 03. 2024

사랑표현

백지원


제목- 사랑표현


달러구트 꿈 백화점에서는 꿈이라는 주제를 담고 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꿈, 혹은 그리운 사람을 만나는 꿈 등을 사고, 값은 그 꿈을 꾸고 얻은 감정으로 지불한다. 나도 가끔씩은 허구나 혹은 이야기가 현실보다 더 재미있다. 그렇기에 이 책이 떠오르면서, ‘아 사람은 현실에서는 그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꿈에서라도 그 감정을 느끼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우리가 유튜브로 본 내용이 진짜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 아니듯, 이야기로만 겪는 내용은 정말 우리가 겪은 내용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우리의 현실이 아니었다. 책 작별인사에서는 이야기를 이렇게 소개했다. ‘그것은 인간들이 자기들의 무의미한 인생에 억지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만들어낸 발명품‘ 이라고 말이다. 왜 사람들은 육체가 있고, 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동은 둘 째 치고, 왜 굳이 허상과 허구로부터 감정을 얻는것일까. 행동으로 직접 겪기 위해 육체가 존재하며, 그렇게 감정을 또 얻고, 그렇게 또 그 감정을 표출하는 것인데 말이다.


우리 시대의 도우미이자 경쟁 상대인 인공지능은 당연하게도 행동을 취하지 못한다. 감각은 아쉽게도 아직까지는 우리 인간들에게만 있다는 점 때문도 있다. 그렇기에 인공지능은 당연하게도 경험이 하나도 들어있지 않은, 그냥 코딩 된 깡통일 뿐이다. 그것들이 만약 인간이 회사에서 해고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괜찮으세요?’ 라고 답하면, 그것이 정말 위로가 될까 부터 알아봐야 한다. 자신들의 경험을 공유하면서 서로의 이야기에 웃으며 위로하는 것이 인간이다. 술 한 캔 까면서 어른들의 뒷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 같이 술을 마시면서 자신의 경험을 공유할 수 없는 인공지능은 그러지 못한다. 이처럼 우리에게는 경험, 즉 행동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와 다르게 인공지능은 그저 사람의 입력, 슬프다고 하면 위로를 해주고 취업했다고 하면 축하해줘야 한다는 교육이 되어있을 뿐, 자신이 직접 겪은 것은 없다. 인공지능이 없는 것은 바로 경험이었다. 그 경험이라는 것은 인간들에게 지혜를 만들고, 그것이 곧 신뢰와 감동을 만든다.


애정행각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는 행동이라고 배웠다. 손을 잡고, 밤 산책을 한 바퀴도는 것.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 바로 그것이다. 서로 살아있음을 온기로 느끼는 것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하게도 육체, 피가 흐르고 땀이 흐르고, 체온이 남아있는 몸이 필요하다. 경험을 위함이었다. 여기서 동일론이 나오는데, 정신과 육체가 불리될 수 없는 동일한 실체라고 주장하는 철학적 관점이다. 뇌로만 사랑하고, 그녀와 그의 존재를 생각만 한다면 그게 사랑일까? 그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이원론이다. 정신과 육체는 따로 분리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관점이다.


청소년들의 사랑을 예로 들어보겠다. 팔 끝에 이어진 손가락으로 ‘사랑해’ 를 보내고, 전화를 걸어 말하고, 애인의 집까지 데려다주는 것. 왜 그들은 서로의 집에 데려다주는 것인가 궁금했는데, 어쩌면 그 사람의 존재를 더 잘 느끼기 위함은 아닐까 싶어졌다. 흔히 말하는 애정표현, 하지 않으면 그것이 사랑하는 의미가 있을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내가 그 사람과 사귀고 싶어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냥 좋아해서 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감정 떄문보다는 육체적인 행동이 더 맞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짝사랑 단계에서 머뭇머뭇 거리고, 제대로 말도 섞지 못하는 현실을 상상해보자. 그럼 당연하게도 사귀어서 연인다운 ’행동‘ 을 하고 싶다는 욕구를 느낀다.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을 행동으로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단계가 바로 연인의 관계이기 때문에 그 사람과 사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 아닐까 싶었다.


이처럼 사랑의 행동들은 전부 뇌에서 나오는가 육체에서 나오는가. 당연하게도 육체에서 나온다. 모든 감정과 생각은 뇌에서 나온다. 내가 오늘 어떤 사랑의 말을 남길지는 뇌의 주름의 움직임으로부터 나올 것이다. 하지만 그걸 표현 하는 것은 결국 육체이다.


작별인사 책에서 나오는 지문을 보면 머리만 남아버린 민이의 대사가 나온다. “말을 할 수도 있고 들리기도 하는데 몸이 없으니까 내가 나 같지 않아요. 생각은 할 수 있는데, 아무것도 움직일 수 없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요. 몸을 만들어주세요. 선이 누나 손을 잡고 어디든 걸어가 보고 싶어요. 철이 형도 보고 싶고요.” 선이 누나의 손을 잡고 싶고, 걸어다니고 싶고. 전부 육체로 할 수 있는 일이다. 만약 수정구슬에 갇혀 영생을 살게 된다면, 그렇게 감정을 교류한다면, 그것은 같이 있어도 같이 있는 것 같지 않을 것이고, 살아있지만 살아있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스토리를 일주일에 한 번씩 올리지 않으면 사람들은 나의 존재를 점차 잊어간다. 내가 어떻게든 사진을 찍어 업로드 하는 행동을 보여야 사람들이 나의 존재를 스토리가 사라지는 24시간동안은 조금이나마 기억한다. 만약 여기서 내가 활동을 하지 않게 되면, 사람들은 내가 있는지, 아니 그런 질문조차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행동은 우리에게 있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어 방이라는 가상을 만든 설. 그는 그 안에 중국어를 아예 모르는 사람을 넣어 중국어로 된 질문에 답하게 한다면 어떻게 될지 실험을 진행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적어 넣어, 그 안에 있는 사람이 쉽게 대답할 수 있게 했다. 그럼 여기서, 그럼 그 질문을 답하면서 중국어를 좀 비교적 쉽게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과연 중국어를 이해한 것일까?


예를 들어, 우리가 하는 시험공부, 나는 특히 역사는 외우는 과목 중 속한다. 솔직히 다들 한 번씩은 말했다. ‘내가 직접 겪은 것도 아닌데 왜 배워야 해?’ 나는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시험 때만 필요한 역사 공부는 시험을 대비한 공부일 뿐, 실전에서는 절대 쓰일일이 없다. 또한, 이해라는 것 자체는 내가 직접 경험해보고 아는 것을 뜻한다. 수학 공식을 달달 외우는 것보다도, 직접 칠판 앞으로 나가 문제에 적용 시키는 것. 그 속에서 비로소 이해를 하는 것이지, 그저 외우고만 있다고 해서 그것이 내 지식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처럼 중국어 방에서 사람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한다고 해서 그 중국어를 이해했다고 할 수 없다. 씨에씨에(고마워) 라고 올라온 문장을 보고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만 대답과 질문은 반복되었기에 우리들은 아무렇지 않게 부커치(천만에) 라고 답하기 때문이다. 마치 친구가 울고 있으면 무조건 위로해줘야 한다고 코딩된 인공지능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기계가 과연 인간처럼 지혜를 가졌다고 할 수는 없다. 그들의 상처 밖으로 따듯하고 진득한 피가 뚝뚝 흘러내린다고 해도, 그게 진짜 경험이지도 않고, 그들은 인간과 다르게 감각도 없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뜨거운 냄비를 만진 뒤에 감각적으로 ‘아 뜨거운 건 만지면 아프니까 만지지 말아야지.’ 라고 생각하면서 깨닫지만, 인공지능은 그런 경험도 없이 ‘만지면 안 된다.‘ 라고 생각하면서도 깨닫지는 못한다.


인간의 감각은 호기심에서 나오지만, 그들은 효율성을 원하기에 호기심이 나올리 없다. 그렇기에 인간의 상상을 따라하는 셈 밖에 안 되는 것이고, 그렇기에 인간에게 부정당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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