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즈메의 문단속 문제>
정서윤
-영원한 기약-
"덧도 없이 가벼운 죽음이라 미래의 인간들의 입안에 오르내리지만, 그들의 죽음도 각자만의 사정을 소유하며 단단하지만 또 가장 나약한 죽음을 맞이하니라. 결속성이 영구적으로 분해된 인간이라도 "상복"과 "장례식"이라는 관례적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한동안 본질적으로 느끼는 자연스러운 "우울과 상심"이라는 감정은 그 관례에 포함되는 당연한 행동이자, 그곳에서 베제되는 행동을 하는 인간들은 "싸이코패스"라 치부되느니라."
예전에 공포 괴담 채널 심야괴담회에서 본 프로그램 중 시체를 닦는 사람들의 귀신 목격담 이야기를 본 적이 있었다. 마냥 공포스럽다며 즐겼던 그때의 나였지만, 인간의 모습을 너무나 해부학적 구도로 잔인하게 표현되었으며, 기괴한 요소까지 곁들여 그들의 사망 사인이 더욱 부각되어 보이게 하는 것이 프로그램의 진실된 목적인 듯 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람들의 아름다운 문인사들과 그들이 했던 단어들과 표현들, 모든 것들이 잊혀지는 것이 괜시레 안타까웠다. 단지 이젠 "영혼 없는 음침한 시체"로써 관에 묻혀지고 사람들에게서 잊혀지는 것이다. 관리를 받지 못한 잡초의 풀내음이 그들의 몸 안에서 피어나고, 언제 왔는지 모를 가족들의 정성이 이젠 부패한 썩은 사과들과 여러가지 주전부리들이, 술병들이 예전에 왔던 그대로 시간만 바뀐 듯이 무덤 앞에 놓여있다. 그것은 내가 이렇게 연고 없는 무덤들을 지나가며 언제나 공통적으로 보던 풍경이었다. 난 그곳에서 인간의 마지막 최후와 그 안에서 미처 드러나지 못한 사건의 진상들을 기억해주는 것이 생각보다 중요한 것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소타는 계승적이고 유전적 강제성에 의해 , 어쩌면 이러한 일을 누군가는 해야 한다는 단일화된 의무감 덕분에 토지시의 지위를 맡고, 사건을 기억하게 된 건 아닐까.
사람들의 장례식은 보통 우울한 분위기에서 전개된다. 이러한 일들로 크게 눈물을 흘려본 적 없던 내가 이런 사람들의 사정들을 모두 비상한 공감능력을 활용해 해결해 줄수는 없지만, 그들의 죽음만큼은 사진과 매체 자료들로 인해서 진정성 있게 축복이 따르기를 영원히 기약해줄 수 있다. 재해에서 사망하거나 죽게 된 안타까운 사람들의 입은 봉쇄되어있고, 그들의 피멍들과 핏자국들은 우리가 그들을 씻길 때까지 시간이 해결해주기를 학수고대하는 고대의 징표라고 놔둘 수 있다. 그렇지만 대개 일반적인 인간의 죽음 같은 경우는,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의 주장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 사람은 많은 환자들의 임종을 지켜보며 병을 가진 환자들이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기까지 대개 다섯 단계의 과정을 거친다고 주장하였다. 먼저 환자들은 자신의 죽음을 거부하면서 자신의 삶이 예전처럼 계속되기를 바라며, 치료가 끝나면 집에 돌아가겠다는 식으로 말하곤 한다. 두 번째 단계로는 분노를 한다. 반발을 하며 환자는 죄인을 하나 지목하여 모든 걸 그의 탓으로 돌리려고 한다. 그들의 마음은 그곳에서 조금씩 페시미즘을 형성하게 되고, 명성을 얻던 그들의 입에서는 조곤하고 인자한 말투 대신 욕과 거친 말투들이 쏟아져나오게 된다. 그 다음으로 환자는 의사와 운명과 하느님에게 유예를 요구한다. "우리 아들이 수능 끝나고 발표나는 때까지만 살고 싶어요"라는 식으로 날짜를 못 박으며 괜한 희망에 전례 없는 당황감을 선사하기도 하는 단계이다. 이제 네 번째 단계로는 절정에 이르게 된다. 그들은 의기소침해지며, 기력을 완전히 잃고 만다. 모든 걸 놓아 버린 듯, 더 이상 싸울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세상을 곧 떠나게 될 환자는 통증을 일시적으로만 완화해주는 치료로 간신히 목숨을 이어가면서도 가장 아름다운 그림이나 가장 아름다운 음악을 요구한다.
사람들의 아름다운 그림과 마지막 몸짓들이 기억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문단속을 하는 것은, 영원한 그들의 좋은 기억을 영원히 남게 하기 위해서이다. 모방되는 그들의 특성들이 자녀에게도 이어지고, 또 하나의 죽은 사람을 만들게 되면서 놀랍도록 닮은 피조물과 범람체들을 인식하는 사람들은 그의 변형된 특성들을 기억할 뿐, 결국 원조의 특징들을 기억하지 않고 잊게 된다. 그리고 점점 사람들의 관심이 사라지면 이것은 "뒷문이 열리는 현상"으로 미미즈가 출몰하게 된다. 이것은 단순히 영화에서는 재해라고 추구되고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적 균열의 시작이라 표현되었지만, 현실에 대조해보면 이것은 향수병이나 영원한 소멸로 이어질 수 있다. 한 사람의 존재를 완전히 잊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은 알지만, 그것이 어쩌면 하나의 피터지는 싸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기도 한다. 변형된 자아의 자녀들은 놀랍도록 죽은 사람의 행동과 똑같은 행동을 하며 그 곳에서 자신의 가치관을 형성해나가기 때문에, 사람들을 자신의 새로운 매력과 유혹에 끌리게 하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 20세기 초 러시아의 두 지도자였던 스탈린과 트로츠키 사이의 권력 투쟁은, 지배자를 만들게 되고 독주 체제를 만들게 된다. 사회 계층 구조에서 더 높이, 더 빨리 올라가는 사람들은, 새로운 개념과 새로운 물건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사람들을 유혹할 줄 알고 살인자들을 모을 줄 알며 정보를 왜곡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변형된 그들의 세계관은 사람들의 원조에 대한 정보를 왜곡하게 되므로, 그들에 대한 영원한 기약과 약속들이 분해되며 뒷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개인주의의 사회에서 조금 더 넓은 원초적인 형태를 보존하는 나무 관보다는, 조금 더 돈을 적게 들이기 위해서 화장을 하여 간단한 관 속에 보관하고 그곳에서 추모를 받는 것으로 축소되게 되었다. 중간 칸이 가장 눈에 잘 띄이는지라 경쟁이 높은 곳이며 어쩌면 제일 비싼 곳일수도 있고, 위쪽이나 아랫쪽에 놓인 사람들의 추모의 뜻은 이제 "그들을 기억하겠다"가 아닌, "죽음에 대한 마지막 호의를 당신에게 바치겠다"라는 한 끗 차이의 인식 변화로 완전히 다른 문장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두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과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일을 해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결국 무언가를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할 때 이루어진다. 소타를 살리기 위해 스즈메는 도쿄의 뒷문으로 몸을 던졌다. 고향으로 돌아가 스스로가 요석이 되도 좋으니 소타를 살려달라고 간절히 외쳤다. 그때 스즈메가 본 것은 자신의 '과거' 였다. 엄마를 잃고 울면서 길을 찾지 못하는 어린 아이에게 스즈메는 지금 아무리 많이 슬프다 해도 잘 자라 어른이 될 것이라 위로를 전한다. '자기 내면의 외면화' 인 것이다. 외부적인 특성과 자신의 과거가 결합하여 조금 더 성숙한 나를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두려워한다. 언젠가 자신이 정말 상상하지 않고 싶었던 그때로 돌아가서 과거의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이 쉽지는 않다. 예를 들어 젊은 여성이 어린 시절에 범죄를 당했더라면 이제 성인이 된 그녀가 상상을 통해 과거로 돌아가서 상처 받은 소녀를 도와주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며, 우리는 이것을 "시각화"라는 최면 치료로 직접적으로 실현시키고 있다. 자기 과거를 미화하거나 지어낸 거짓말에 다시 이끌리지 말고 상상의 힘만을 오로지 이용한 치료법은, 그 아픈 기억을 나에게서 잊게 해주는 가장 좋은 치료법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이것이 금세 괄목할 수 있는 효과적인 효율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는 죽은 사람들에 대한 무관심을 잡초의 무관심으로 보여주기 싫어 형태가 언제나 한정되어 있고 일정한 "도자기"에 유골을 넣어 보관하게 되었다. 그 안에 있는 꽃과 사진은 바래도, 그것만큼은 바래지 않기 때문이다. 아픔의 추억들을 괜히 회상하며 불에 태우는 것이 이젠 과거에 대한 잊음과 모든 것에 대한 재시작을 의미하는 것일까, 한 때 가장 사랑하고 고마워했으며, 감사했던 사람을 불에 태우는 것은 도대체 무슨 깨달음을 자아내게 하는 것인가.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 해보았지만, 우리는 말 그대로 과거의 기억을 잊기만 하려고 할 뿐, 다시 기억하는 것에 대해서 극도로 꺼려한다. 우리가 당연히 내쉬는 숨처럼 그때 잠시 흥분되는 감정으로 기억하더라도, 2주 정도가 지나면 모든 것을 다 버린 듯 의기 소침 한채로 다시 세상에 돌아가게 된다. 우리에게 정부와 국회, 아니 사회는 사람들을 기억할 시간을 너무 짧은 간격에 나누어 제공하고 있다. 잠시 돌아가신 사람들을 생각하며 추억에 잠기더라도 곧 영어학원에 갈 시간이 다가오는 것 처럼 말이다. 난 그래서 이렇게 유례 없는 빗나간 사례들이 생긴 거라고도 생각한다. 그들을 잊는다고 해서 현실적인 영향을 끼치는 재해는 없지만, 재해로 인해 우리가 미처 모두를 기억하지 못하는 한정된 기억력이 마치 나라에 바칠 몸이 하나밖에 없다는 독립열사 한 분의 외침과 유사한 듯 하다. 그래서 난, 인간들이 이 존재들을 영원토록 잊지 말고, "지속적 기억"을 유지하며 세상을 살아갔으면 좋겠다. 이 죽음은 영원한 기약으로 인해서 영원의 신성한 죽음으로도, 한 번의 성수의 뿌림의 과정으로 인해서 효력을 필연적으로 받지만 , 그것이 또 영구적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난 이러한 확실성 있는 명예와 이름 따위는 다 필요없고, 그것을 기억할 사람들이 있다는 것 만으로도 사람들의 영원한 기약은 이미 성사된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영화 코코에서 헥토르는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어 거의 소멸하기 직전이었다. 그렇지만 노래를 불러줌으로써 결국 아버지의 존재를 기억하게 되고, 영원한 행복을 맞이하게 된다. 이것이 단지 영화의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산일 것이다. 당신이 진정한 기억을 할 때, 어쩌면 아주 무한한 시간이 지나 나 자신이 세상에서 가루가 되어 소멸되어 그러한 도자기 같은 데에나 안착될 때, 화려한 죽음보다, 불꽃놀이가 터지고 성대한 파티가 이어지는 사람들의 추모의 함성들과, 꽃으로 잔뜩 장식된 화관들이 고급스럽게 나의 관 앞에 놓이는 것은 바라지도 않겠다. 그저, 정말이지 내가 "나만의 유일한 형태"로만 기억되는 것을 바라며, 내가 했던 행동 하나만이라도 기억해준다면 좋겠다. "솔직한 형태가 나만이 가질 수 있는 거니까, 그것이 어쩌면 지겨울지도 모르는 영원한 기약의 약속일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