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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주인의 의미란

by 제이티

류호림



우리는 민주주의라고 하면 모두가 평등하고 대등한 위치에서 당당히 자신의 의견을 표출할 수 있는 모양새를 떠올린다. 그리고 이를 떠올리다 보면 생각나는 것이 바로 ‘표현의 자유’이다. 이러한 표현의 자유라고 해서 자유롭지만은 않은 모순적인 상황들이 있다. 꼭 공식적인 금지 조치가 없어도 대중의 호응을 받지 못하는 목소리를 조용히 만들고, 불편한 사실을 어둠 속에 묶어둘 수 있는 방법, 이는 정부의 제제와 협박도 아닌 눈치이다. 언론은 극단적으로 중앙에 집중 되어 있으며, 특히 영국 언론이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 또한 대부분이 일부 중요한 소식들에 대해 솔직해질 수 없는 부자들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정설을 믿으며 은근한 검멸이 희곡과 영화, 라디오 등에서도 이루어지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는 사람들이 ‘잘 하지 않는 일’이다. 왜 잘 하지 않느냐, 이는 말로 표현하기 보다 사례로 예시를 들어보면 이해가 더 쉬울 것 같다. 이렇게 질문을 던져보자. “아무리 인기가 없는 의견이라고, 심지어 멍청한 의견일지라도 모두 목소리를 낼 자격이 있는가?”, 우리는 힘차게 대답할 것이다. “그렇다!”, 그렇다면 이 질문은 어떠한가? “우크라이나를 향한 푸틴의 공격은 어떠한가?, 이 또한 목소리를 낼 자격이 있는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아니오’라는 답이 돌아올 가능성이 크다. 이는 현재의 정설과 걸쳐 있는 이슈이기 때문에 우리는 문득 우리의 발언에 멈칫하게 되면서 표현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의 모순을 마주하게 된다.

표현의 자유는 모순되는 단면 뿐만 아니라 어딘가 심하게 뒤틀려진 단면 또한 가지고 있다. 표현의 자유는 다양하고 날카로운 통찰들이 비판적 사고를 통해 사회를 더 성숙시키고, 성장시키는 역할을 하는데 점점 표현의 자유는 그저 비난의 손짓의 모양으로 변화하고 있는 듯 하다. 장원영이 두 손으로 딸기를 먹었다는 것, 아름답고 잘난 그녀의 외모에 조금의 애교가 더해지니 일부 사람들의 입장에선 재수 없어보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댓글창과 익명이라는 표현의 자유의 우산을 쓴 채 장원영을 무자비하게 ‘비난’했다. 논란이 된 영상의 댓글창에서는 온통 욕설들과 비꼬는 말투들로 가득찼다. 이는 표현의 자유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그저 특정인을 갈구는 사이버 폭력의 일부아닐까? 이러한 현상은 연예계에서 뿐만 아니라 정치 뉴스나 대면적인 사회에서도 어렵지 않게 마주할 수 있다.

이처럼 표현의 자유는 그저 예쁘게 포장되어 있었을 뿐이지 표현의 자유 속에서 우리가 해결하지 못한 과제들은 너무나 많았고, 우리는 이를 인식하지 못했던 것인지 외면했던 것인지 이 과제들은 쌓이고 쌓여 모순과 왜곡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표현의 자유 속 공통점을 찾아보자면 표현의 자유의 목적과 본질을 잊고 있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던 것 같다.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라는 사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자유의 뿌리라고 볼 수 있는 민주주의라는 개념부터 완벽히 짚고 넘어가보자.

도대체 민주주의라는 것이 무엇일까, 너무 자유로워서 자유라는 가면을 쓰고 특정 집단을 조롱하고 공격하는 것? 편가르기하며 누가 좋고 누가 나쁘다를 가려내는 것? 가끔은 눈치 보여서 나의 의견을 재빨리 뒤로 숨기는 선택의 연속? 민주주의란 국민이 주인이 되는 사상을 뜻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오해하곤 한다, ‘내가 주인’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하인은 누구인가? 사람들은 자신이 주인이라는 명분으로 비판이 아닌 비난을 하고 사회적 분위기를 부정적이고 어둡게만 만든다. 뿐만 아니라 정치인들의 연설을 들어보면 ‘우리가 주인이지 않습니까?’ 하는 언뜻 정의로워 보일 수 있는 호통이 들려온다. 또 다시 묻는다, ‘그럼 당신들이 언급하는 하인은 누구입니까?’ 민주주의에서 나타나는 ‘주인’의 의미는 하인과 상반되는 단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주인의 ‘힘’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라는 사상은 모두가 평등하고 같은 위치에서 서로를 비판적 태도로 바라보면서 성장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그 언론 속에서도 권력 구조가 존재한다는 것이 문제이다. 러시아 정부에 대한 비판이 암묵적 권열로 인해 다루어지지 못했던 것처럼 권력 구조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할 때 민주주의가 얼마나 위협당하는지를 보여준다.

“나는 당신의 말을 싫어한다. 그러나 당신이 그 말을 할 수 있는 권리를 나는 죽도록 요구할 것이다.”

-조지 오웰, <동물농장> 서문 중

로자 룩셈부르크의 말처럼, 자유는 ‘남을 위한 자유’이다. 나도 사회의 주인의 존엄을 가지고 있기에, 내 옆의 너 또한 사회의 주인의 존엄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는 서로를 비난하기만 해서는 안된다. 자유라는 가면을 쓰고 타인의 자유와 존엄성을 침해해선 안된다. 표현의 자유의 어느 정도 발언까지 허용되어야 할까 기준을 정하기에 앞서, 우리는 민주주의의 정의를 명확히 알고 민주주의의 주인이 나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권리의 힘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를 항상 명심해두면서 타인의 존엄성은 보존하되, 익명성이 강화되면서 언론 속에서 만큼은 권력 구조가 허물어져야 하고, 우리는 모두 같은 계단에 서 있다는 가정 하에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는 사회의 모습이 더 가꿔져야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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