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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 리볼빙

by 제이티

박재영



“어느 날 아마 열 살쯤 된 것 같은 사내아이가 좁은 길에서 커다란 말이 끄는 짐마차를 몰면서 말이 방향을 바꾸려고 할 때마다 채찍을 휘두르는 것을 보았다. 그때 문득 만약 저런 동물들이 제게 힘이 있음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녀석들에게 아무런 힘을 행사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 인간이 동물을 착취하는 방식과 부자가 프롤레타리아를 착취하는 방식이 아주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지 오웰, <동물농장> 서문


현대 민주주의의 모델은 과거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대중들의 투표에 의해서 안건이 결정되고 시민들의 의견이 정부 운영에 반영되는 현대 민주정치의 기초적인 틀을 만들었지만, 일정 수준 이상의 학력을 가추고 노예, 여성이 아닌 자유민 성인 남성만이 이 민주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한계점을 보였다. 하지만 단순히 현대 민주주의의 모델이 된 것 이상으로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풀뿌리 민주주의’라고도 지칭되는 국민참여 민주주의가 처음 출발한 장소이기도 하다. 풀뿌리 민주주의는 국민 개개인에게 골고루 영향을 미치는 대중적인 민주주의를 뜻한다. 국민이 대표자를 선출해 그 대표자들끼리 국민의 의견을 대신하고 국민은 평상시 정치와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바로 ‘풀뿌리 민주주의’다. 그런데 이러한 참여 민주주의가 완성되려면 한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바로 ‘표현의 자유’다. 조지 오웰은 표현의 자유에 대해서 내가 그 사람의 말을 싫어해도, 그 말을 위해서 죽도록 요구하는 권리라고 설명했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표현의 자유란, 사회규범이나 보편적 가치를 크게 위반하지 않는 의견이라면 그 어떤 의견이라도 목소리를 낼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말이라는 동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힘이 굉장히 강하다. 주로 야생에서 호랑이나 사자와 같은 포식동물에게 야생마가 잡아 먹히는 것을 다큐멘터리에서 많이 보아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말들은 대부분 나이들거나 병들어서 몸이 약해진 말들이다. 젊고 튼튼한 말의 경우 무거운 짐을 싣고도 빠른 속도로 질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말의 뒷발차기는 호랑이나 사자와 같은 포식동물조차도 두려워할 정도로 강한 동물이 바로 ‘말’이다. <동물 농장>의 서문 속 ‘말’은 우리를 상징한다. 표현하지 않고 표현의 자유가 없는 우리를 말이다. 말의 힘은 호랑이나 사자와도 순간적인 파워가 비슷할 정도로 강해, 열 살 쯤 된 남자아이는 자신이 가진 힘의 1/10만 써도 제압하거나 공격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말은 공격할 수 있는 법을 모른다. 반항할 줄도 모르고, 그저 자신의 등을 내리치는 채찍에 따라서 이리 움직이고, 저리 움직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표현의 자유가 없는 대중이며, 대중이 단합해 나오는 힘보다 한참 약한 엘리트 계층에게 억눌려있는 대중을 조지 오웰은 채찍 질 당하면서 전진하는 말에 비유했다. 이러한 표현 없는 대중에 대한 오웰의 비판은 소설 <동물농장>에서도 이어진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상징하는 복서는 항상 농장을 위해서 남들보다 먼저 일어나 남들보다 늦게 헛간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이렇게 헌신하는 복서는 전쟁에서 총상을 맞아도 계속해서 노동을 하다가 결국 쓰러져 폐마 도축업자에게 팔려간다. 이용당하기만 하고, 버려진다. 힘을 가지고 있는데도 말이다. 또 복서는 <동물농장> 안에서 문맹 중 하나다. 이것은 오웰이 서문 이외에 또 무지한 대중을 비판한 것이다. 표현의 자유가 없고, 무지한 대중은 그저 동물원의 말. 짐마차를 끄는 말에 불과하다. 과거 미국의 영상자료를 보면, 야생마들이 자유롭게 평원을 뛰어다니고 퓨마나 쿠거가 습격하면 뒷발차기로 역습까지 성공하는, 그런 모습과는 다르게 말이다. 그것은 현대 교육을 통해 풀뿌리 민주주의. 민주주의를 할 수 있는 대중과, 무지하고 표현의 자유가 없으며 표현 할 줄 모르는 대중을 나타낸다.


이처럼 표현의 자유가 주어지지 않은 대중은 그저 열 살 남짓한 꼬마 아이에게도 채찍질을 당한다. 하지만 그 꼬마 아이는 과연 모르는 야생 백마에 올라타서도 그렇게 채찍질을 할 수 있을까? 그 야생마는 바로 앞발을 치켜들고 뛰어다니며 꼬마를 떨굴 것이고 채찍으로 때리면 뒷발차기로 날려버릴 것이다. 그것이 바로 교육받고 표현하는 대중이다. 참여 민주주의란 엘리트 계층을 국민 손으로 선발하는 것을 넘어 국민이 정치에 깊게 관여하는 것이다. 참여민주주의라는 것이 실행되면 권력자들은 권력을 입법부, 행정부 안에서 확고히 하기 어렵고 행정부와 입법, 사법부 모두에서 대중 모두의 의견이 반영되어 결론적으로 삶의 질이 더욱 상승할 것이다. 과연 어느 유능한 독재자가 와도 그 시스템 안에서 민주주의를 부술 수 있을까? 그것은 야생마의 등에 올라탄 열 살 꼬마아이와 비슷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표현의 자유와 민주주의의 힘이다.


반면 이러한 표현의 자유 역시 장점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표현이라는 것은 말과 같은 것이다. 열 살 남짓한 꼬마에게도 통제당하는 짐말이라면 작은 우리 안에서라도 얌전하게 있겠지만 만약에 그것이 교육되고 표현하는 대중, 즉 야생마 같은 존재라면 국가라는 커다란 동물원 우리 안을 이리저리 헤집고 다니면서 혼란일 만들 수도 있다. 그것이 바로 표현의 자유의 문제점이다. 우선 그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사회에 극단적인 사상이 통용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표현의 자유라는 것은 그 자체로 모든 권리를 보호하려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극단주의적 사상이나 주장에도 포함될까? 만약 포함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모순이고 포함된다면 문제점이다. 그것이 문제다. 예시를 들자면, 해외 국가들의 네오나치를 들 수 있다. 네오나치들은 금기시된 히틀러와 나치즘을 찬양한다. 그들은 국가사회주의 사상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사상이고 유대인은 열등한 인종이라는 혐오 발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그들의 공식 주장인 것처럼 내뱉고 뱉은 말에 책임도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들은 유대인 공동체와 문제까지 일으켜, 세계 여러 나라의 골칫덩이가 되었다. 그렇다고 이들을 규제하자니 독일처럼 위헌정당해산법과 같이 나치를 직접 규제할 수 있는 법안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들이 헌법에 명시되어있는 표현의 자유를 들어 나치즘 찬양을 정당화한다면 이는 이대로 사회문제가 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무분별한 표현의 자유는 사회갈등을 불러올 수도 있다. 조금 오래되긴 해도, 민스트럴 쇼라는 연극이 있었다. 두 명의 백인 배우가 한명은 백인, 한명은 얼굴에 숯칠한 것처럼 흑인을 흉내내는 연극이었다. 이는 원래 많은 사람들의 공감과 재미, 몸개그를 이용한 일종의 ‘서양판 개그 콘서트’와 비슷한 컨셉의 연극이었다. 하지만 민권법 제정 이후 흑인을 비하한다는 논란이 늘어나고, 이로 인한 사회갈등이 늘어나면서 블렉페이스, 민스트럴 쇼는 점차 사장되기 시작했고 현재도 사장 된 체 있다. 이러한 표현의 자유의 두 문제점들을 모두 포함하는 마지막 오류는, 바로 내용과 형식을 완전히 분리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표현이 민스트럴 쇼처럼 흑인들이 보기 불편해 할 수 있어도 표현의 자유 원칙 상 비하 의도가 없었으면 보호해야 하고, 네오나치즘은 처벌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를 현실적으로 구분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모호한 기준 속 사회갈등은 이러한 표현의 자유를 빙자한 극단주의 속에 점차 심화되고, 야생마가 날뛰는 것이다.


이렇게 많은 모순을 가지고 있는 민주주의의 기본, 표현의 자유지만 나는 이런 단점들을 생각해 자유의 규모를 축소하는 것보다는, 시민의 자정 노력을 통해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 할 수 있다고 본다. 그 근거로, 현대의 독일을 꼽을 수 있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독일은 탈 나치화를 거쳐 나치와 관련된 모든 것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 독일 연방국 헌법 85, 86, 86조 a항에는 이러한 나치 찬양에 대한 처벌 방침이 명시되어있다. 하지만 독일의 네오나치들은 이러한 법의 처벌로 감옥에 가기보단, 시민들에 의해서 점차 사회에서 퇴출되어간다. 몇 년 전 독일에서 한 네오나치 시위가 열렸는데 그 시위에 참가한 참가자들의 몇 배나 되는 지역 주민들이 몰려들어 맞불집회를 벌였다. 전국의 네오나치들이 모여서 시위를 열었으나 지역 주민들이 엄청난 반발 속에 그 시위는 흐지부지 되었고 그들은 공식집회에서 혐오발언을 쏟아낼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독일주민들의 네오나치에 대한 증오는 더욱 심해서, 경찰이 나치 시위에 출동하는 이유는 그들을 체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민과 시위대의 충돌을 막기위해서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는 등, 독일에서는 다행히도 극단주의의 물결은 시민의 자정작용에 의해서 점차 희석되고 있다. 나는 이러한 독일의 사례가 모범 모델이라고 생각한다. 전후, 독일은 완전한 탈나치화를 법에 명시하였고 이와 관련된 처벌 조항, 그리고 제2의 나치당이 창당 될 시 해산할 수 있는 위헌 정당해산법안까지 제작하는 등 반나치화에 상당한 투자를 했다. 또한 교육 방면에서 반나치 교육에 엄청난 투자를 해, 나치 시위보다 몇 배는 많은 주민들이 반나치 시위를 만드는 자정작용을 탄생시켰다. 우리나라 역시 그래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북한을 찬양하거나 조선족과 같은 소수민족들을 몰아내자고 주장하는 종북주의자, 극단주의자들이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와 관련된 차별 방지 교육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고 반 북한, 반 차별 교육과 같은 극단주의에 대항하는 교육이 잘 안되어있기 때문에 그에 동조하는 이들 역시 많다. 대표적으로 2019년 당시 적대국 수괴 김정은을 환영하려고 준비한 ‘위인맞이위원회’와 코로나 방역 지침까지 어기며 집회를하는 ‘태극기 집회’ 등이 해당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극단주의자들을 위시해 당장 표현의 자유를 규제하고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적용하기보다는 점진적인 교육을 통해서 시민들의 자정작용을 믿어보는 것이 더욱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민주주의의 꽃은 의견 표현이고 표현의 자유를 억제하는 것은 곳 민주주의를 억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극단적인 의견보다 정상적인 의견을 가진 이들이 늘어나면 점차 극단주의는 사그라들 것임을 우리는 독일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다. 대중을 우매하고 교육받지 못하며 표현하지 못한 이들로 만드는 것은 그저 민주주의의 꽃들을 밟아버리고 짐말로 만드는 것이다. 표현할 줄 아는 대중은 권력자에게 가장 큰 위협으로 다가오고 민주주의의 보루가 된다. 그리고 우린 말이 아니다. 짐승이 아니기 때문에 교육을 통해 극단주의를 억제할 수 있다. 이러한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서 무턱대고 표현의 자유를 억제하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생각한다. 독일은 표현의 자유를 억제하는 법안이 없지만, 네오나치들을 주민들이 사회에서 배척해 자정시키는 것처럼 말이다. 대한민국 역시 독일과 같이 지속적인 교육과 같은 점진적 개혁으로 극단주의를 민주적으로 사그라뜨릴 수 있다. 미래의 가능성을 보지 않고 당장의 표현의 자유를 억제하는 것은, 미래에 맞이할 독재와 같은 엄청난 빚을 그저 임시적으로 돌려막는, 카드 리볼빙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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