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가람
자아 탐구를 위해, 나에게 주어진 플랫폼은 무엇이였을까. 만약 내가 일본에서 태어났다면 태권도라는 운동을 알기나 했을까? 내가 가난한 지방에서 태어났더라면 아무리 태권도에 재능이 있더라도 그 재능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 플랫폼은 우리에게 자아탐구의 실현의 가능성을 제공해주며 우리는 플랫폼을 통해 본질적인 탐구를 요구한다. 상호작용을 통한 플랫폼의 환경 속 우리는 능력이 없다면 플랫폼은 잠재성에 빠지며, 플랫폼이 없다면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부정적인 역효과들을 입을 수 있으며 환경과 재능이 동시에 요구되는 사회적 기대에 순응하는 플랫폼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사회적인 기준으로 돌아가는 기대의 가치를 순응해야하는 처지에 놓인 환경이라는 플랫폼 때문에 우리는 재능을 발휘할 곳을 찾아도 그 재능을 빼앗긴다.
" 다이빙 말고 수영은 어때? "
우리에게 있어서 물에서 하는 종목 중 다이빙과 수영은 거기서 거기지만, 아름다운 동작을 구사해내는 다이빙의 시청률이 높을까, 심장쫄깃한 경쟁의 수영이 시청률이 높을까. 당연히 수영이다. 다이빙으로 시작된 물의 관심은 수영이라는 또 다른 물놀이로 눈이 텄지만, 왠지 모르게 사회가 기대하는 나의 수영실력은, 옆 라인에서 얼굴이 창백해져도 좀비같이 수영을 ' 해야하는 ' 선수반 급의 실력이였다. 처음에는 단순히 개인의 호오에서 시작한 종목이였지만, 질리도록 말하겠다. 취미는 곧 나의 미래의 가능성이 되고, 호감이라는 감정으로 취미를 동반자로 삼게 되어 결국은 나의 밥벌이가 될 수 밖에 없다.
이런 선수반 애들은 스카우트 되서 선수가 된 것일까? 절대 아니다. 이들 중에서 수영이라는 재능이 빛을 발하기 위해 이런 수영장이라는 플랫폼을 찾아서 알맞게 자신의 재능의 별을 빛내고 있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단번에 뛰어넘는 학습 때문이다. 보통 학원에서 선행이나 내신을 어떻게 하는가? 한단계, 한단계 한 학생 전부에게 맞춰주며 발을 디딛는 연습을 해주던가? 절대 아니다. 시범 아닌 시범을 보여주고 우리에게 계단을 올라오라 시킨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학습이라는 지면에 기초부족 이라는 싱크홀을 만들어내며 단기적 성과가 필요한 학생들에게 계단을 3,4개씩 올라가는 것만큼 비효율적인 학습은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단기적 성과가 점점 학업에서 사라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돈이 안되기 때문이다. 돈이 안된다는 것은 학부모들이 기다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성급하게 성적만을 원하는 학부모들은 계단 올라가는 법부터 해서 발을 디디는 연습을 원하지 않는다. 오직 바로 계단을 오르는 것으로 시작해, 계단을 2개씩 오르기를 원한다. 그 이유는 실패회피 때문이다. 실패회피를 통해 우리는 단기적 성과는 코빼기도 않보이는 학원을 다니며 시험 문제는 한번 쯤 다 풀어본 시험의 획일화가 되어버리며 이러한 실패회피로 인한 학부모들의 극심한 스트레스와 공포심, 두려움 때문에 그들에게서 단기적 성과란 이미 사전에서 지워진 후였다. 그렇기에 우리는 수학 공식을 외워야 할때 수학 공식에 식을 대입하고, 유연성으로 몸을 풀어야 할때 벌써부터 물에 들어가 헤엄을 쳐야하며 건반의 위치를 외울때 체르니를 들어가는 지금의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학원들은 계단이 뻥 뚫린, 한마디로 딛을 수 없는 학습의 계단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단기적 성과를 이루지 못한 학업에서 습득된 싱크홀 가득한 성과로 우리가 만약 시험을 본다면 그것은 어떻게 될까? 사실상 현실적으로 우리는 95점 이상은 맞아온다. 또 왜 그런지는 설명할 수는 없지만 유형을 빡세게 돌려서 이다. 같은 유형을 계속해서 돌려서 잊어버리지 않겠금 우리의 머릿속에 단순히 암기로 대체된 공식으로 우리에게 왜? 라는 의문점을 삭제시킨다. 그렇다면 이러한 공부로 이루어지는 시험은 과연 공정할까?
우리가 알고 있는 시험은 공정성의 끝판왕. 모두의 실력을 점검하기 위해 시행하는거라 하지만, 사실 일주일 전부터 암기하면 그만인 것이 시험이기에, 암기만 잘한다면 잘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바로 시험이다. 하지만 암기를 안하고 시험을 봤을때 50점을 맞았다면 학부모는 전화로 왜 안배운 걸 시험에 내냐며 따지기 바쁘지만, 교사 선생님들은 모두 페이지를 알려줬다며 항의에 해명하기 바쁘다. 하지만 반대로, 시험이 왜 꼬아서 나오는 것일까? 배운 거 나왔다면서 왜 배운 거 끼리 섞고 그럴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시험의 체계지만 이는 아까 말했던 시험의 특성인 공정성과 분별력 때문이다. 세대가 지날수록 우리는 시험의 구조와 기준이 더욱 체계적으로 변하기 시작하며 공정성이 더욱 강화 되기에 우리는 작년보다, 재작년보다 더욱 기괴하고 어렵고 억까당하는 문제들을 보기 일쑤다. 이러한 문제들로 학생들의 멘탈이 깨지기 일쑤고 교사에게 쏟아지는 항의는 더욱 거세진다. 하지만 공정성을 위해, 암기만으로는 되지 않는 문제들이 점점 시험에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이것이 과연 공정성이 맞는가 의문하기 시작한다. 생활에서 쓰지도 못하는 영어에, 이 공식을 어디다 쓰냐며 따지는 수학에, 사실상 시험이라는 공정성의 체계는 우리들에게 공부를 시키기 위한 합법적인 시스템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개인이 좋아하고, 개인이 관심 있는 개인의 호오로부터 시작된 재능. 사실상 재능은 결코 우리에게 단순히 취미로 남아있을 수는 없지만 이것이 좋아서 몰두하게 되고, 남들이 덕후라고 욕을 하던간에, 우리는 이러한 자아 탐구와 동시에 우리의 가능성이 열려있는 미래에 대해 더욱 공부하며 우리의 일생 속 자아 현실이란, 계몽사상의 또 다른 언어이다. 남들이 정해준 틀 속에서 꿈을 찾으려 하지말자. 틀린 문제에서는 올바른 답이 나올 수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비록 잔인한 현실과 그거 해서 밥 먹고 살겠어? 라는 어른들의 핍박에도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심장 박동이 빨라지며 파동이 느껴지는 우리만의 우주를 찾아 떠나자. 어리석음과 무지함으로 사회적 기대에만 순응하는 인생이란, 교과서에서 알려준 유일하게 잘못된 책에서의 해답. 그 오류를 깨고 새로운 자아라는 우주를 찾아 항해하고 여행하는 모험가야 말로, 우리가 꿈꾸고 우리가 실현해야할 틀에서 벗어나는 " 꿈 " 이라는 단어의 본래 가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