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벽화 속 사람들은 왜 뒤틀려 있을까?

이집트 미술사

by 제이티


#영원불멸의 이집트 미술


이집트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클레오파트라? 피라미드? 스핑크스? 사막? 뭐 이런 것들일테다. 잠시 중학교 사회 시간을 떠올려보자. 4대 문명의 발상지가 전부 기억나진 않더라도 분명히 이집트와 나일강은 기억날 것이다. 인류 최초의 문명이 발생한 곳인 만큼 미술도 여기서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럼 이집트 하면 어떤 그림이 떠오르는가?

바로 '벽화'이다. 벽화는 무덤에 그리는 그림이다. 그것도 아주 높은 사람들을 위한 무덤에 말이다. 사회 시간에 배운 고구려 벽화 그림과 신라 벽화 그림도 마찬가지로 왕들을 위한 그림이었다. 모든 예술이 그렇듯 역사발전의 단계상 지배층을 위한 예술부터 시작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집트 벽화를 보면 그림이 어쩐지 이상하다. 다 비슷하게 생긴데다가, 눈은 분명히 앞을 보고 있는데 얼굴은 옆면이다. 더 웃긴 건 몸은 정면을 바로 보고 다리는 옆을 향해 있다. 실제로 이렇게 생긴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그린걸까?



위의 ‘네바문의 정원’이란 작품을 보면 위를 보고 있는 나무도 있고 옆을 보고 있는 나무도 있다. 가운데 연못은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그 안의 물고기의 눈은 관람객을 노려보고 있다. 벽화도, 이 작품도 왜 이렇게 그린걸까? 설이집트 사람들은 그림 실력이 모자랐던걸까? 피라미드도 만들고 스핑크스도 만들고 미라도 만들 줄 알았던 나라 사람들이 그림 실력이 모자라진 않았을텐데. 이렇게 그려야만 했던 이유가 있는 건 아닐까?

한 가지의 시점 가지고는 사물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집트 사람들은 다층적 시점을 이용해 대상을 나타냈다. 마치 사진을 앞에서만 찍으면 그 사람의 얼굴을 제대로 알 수 없는 것과 비슷한 원리이다. 당시엔 카메라도 없었으니 그 대상을 제대로 나타내기 위해서는 여러 시점에서 보아야만 했다. 마치 사람도 한 면만 봐선 진가를 알 수 없듯이 말이다. 이렇듯이 이집트 미술의 특징은 '본질 그대로 나타내기'였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본질 그 자체를 표현해야만 했을까?


이집트는 ‘나일강’이라는 어마어마한 큰 강이 흐르는 지역이다. 강이 있어야 토지도 비옥하고 농사가 잘 되는 법이다. 하지만 강만 있다고 저절로 농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물을 끌어다 쓰기 위해서는 ‘치수’와 ‘관개’가 필수적이다. 이렇게 대규모 공사를 하려면 당연히 대규모 노동력이 필요하다. 이 엄청난 규모의 인력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상냥한 말로 해서는 효과가 미미할 것이다. 당연히 공사장의 ‘작업반장’, 택배 간선 하차장의 ‘추노꾼’처럼 카리스마가 흘러넘치는 전제군주가 필요하다. 큰 강 옆에 황제가 등장하는 건 역사의 법칙이다.


그렇다면 비옥한 토지에서 나오는 생산물은 누구의 것이 될까? 예나 지금이나 일은 직원이 하지만 돈은 사장님이나 건물주가 번다. 마찬가지로 이 생산물들은 ‘파라오’의 차지가 된다. 엄청난 부를 갖게된 파라오는 무엇을 꿈꿨을까? 모든 권력과 돈을 차지한 신과 같은 이 사람은 과연 무얼 바랐을까?


당연히 일단 죽기는 싫었을테지만 죽음은 노예에게든 왕에게든 평등한 법이다. 파라오는 죽고 난 다음의 세상이 두렵지 않았을까? 그러니 죽고 난 후에도 또다른 세상이 있다고 믿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집트는 ‘내세 지향적인 사회’가 된다. 무덤 속의 벽화는 왕이 살아 있을 때 프로필이자 생활기록부다. 대학 갈 때 생활기록부에 한 줄이라도 더 적혀 있어야 유리하듯이 파라오는 무덤에 자신의 업적들을 정확하게 보여주어야 했다. 죽음 뒤 다음 세상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이렇게 내세 지향적인 사회에서는 현실의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것은 큰 의미가 없다.


다시 정리하자면 이집트 미술은 종교적·내세적 사회이기에 모든 미술이 패턴화되고 정확하고 규칙적이다. 당연히 개성이나 창의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마치 무서운 선생님 교실의 책상과 걸상은 한 치 오차 없이 줄지어있는 것처럼 말이다.




https://youtu.be/jrXpxmJbDj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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