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영
나 같은 하찮은 인간이 가장 행복해 질 때가 언제냐, 하면 다른 위대한 이들에게 내 빈약한 자아를 덧 입힐 때 였던 것 같다. 경기도 아니고, 그냥 친구들과 학교 운동장에 모여서 하는 슈팅연습이라서 아무 옷이나 입고가도 상관 없었지만, 추운 날씨에 맨유 반바지 위에 22/23 시즌 홈 유니폼을 입고, 그 위에 패딩 하나를 입은 뒤 집을 나섰다. 바깥 날씨는 정말 추웠다. 괜히 반팔에 패딩만 입었나, 라고 후회할 정도로 추운 날씨에, 산을 올라가 학교에 도착하니 그나마 좀 버틸만 했다. 그리고 친구들을 만난 뒤, 운동화에서 축구화로 갈아 신었다. 축구화는 아디다스 프레데터를 꺼낸다. 마치 내가 지단이라도 된 듯 말이다. 그리고 그냥 힘만 싣어서 차면 되는 걸, 이상한 자세로 폼을 잡아서 찬다. 등 뒤에 마킹 된 7번 호날두가 마치 내가 된 듯 말이다. 이상하게, 축구화도 매칭이 안되면서, 내가 호날두인 것 처럼 차면 평소보다 힘도 잘 실리고, 슛도 잘 감기는 것 같았다. 아마도 그런 것 때문에, 내가 10만원이 넘는 유니폼에도 손을 대고, 30만원이 넘어가는 프로 축구화에도 손을 대는 것일지 모르겠다.
비싸거나, 브랜드의 이름이 있으면 그 브랜드의 품질이 반드시 좋다는 것은 이미 틀린 것으로 증명되었다. 발이 편한 것은, 9만 4천원짜리 미즈노 축구화가 17만원짜리 아디다스 프레데터보다 더 편하다. 그리고 발등으로 차는 슈팅도 더 잘 되고, 캥거루 가죽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진짜인지 몰라도 터치도 더 잘 된다. 하지만, 우리는 미즈노 축구화 대신 나이키와 아디다스를 좋아한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비이성적이다. 합리적인 미즈노 모렐리아 대신 아디다스 프레데터를 선택하는 우리는, 베블런 효과에 잠식되어 있다. 허리띠를 바짝 졸라매야 되는 현재 같은 불황기에, 이러한 베블런 효과는 아직 유효하다. 마치 우리가 유한계급이 될 수 있는 것 처럼, 저것만 사면 나도 유한계급인 것처럼 보이게 될거라고 믿는, 아니 믿고 싶어하는 우리의 심리 앞에서, 불황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것을 산다고 해서 내가 래시포드가 되는 것도 아니고, 호날두가 되는 것도 아니며 유한계급이 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또한 비이성적인 인간의 욕망은, 가격이 올라도 수요와 공급의 법칙을 배제한 소비를 행하게 만든다. 오히려 가격의 상승은, 브랜드 가치의 상승을 의미하며 오히려 더 많은 수요를 부르게 된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유한계급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은 그 욕망으로 불필요한 돈을 소비하고, 차별의 피라미드가 세워진다. 친환경 정책이라고 품질이 떨어져 예전 같지 않은 성능인 아디다스를 우리는 천연가죽을 가공한 미즈노보다 더 좋은 브랜드라고 본다.
이러한 베블런 효과에 따른 비이성적인 소비는 단순히 소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왜 호날두나 메시 같은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끌릴까? 설령 그들이 자신의 취향이 아니라고 해도, 인터넷에서 그들의 플레이를 보면 저도 모르게 감탄이 나올 때가 많다. 나는 메시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유튜브 알고리즘에서 보낸 ‘메시의 마지막 챔스 득점왕’을 보다보면, 감탄이 나온다. 이와 비슷하게, 왜 우리는 명문대에 다니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볼까? 그 이유는 단순하다. 바로 그것이 ‘희소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우리 모두가 메시처럼 드리블하고, 호날두 같이 마무리 짓는다면 호날두와 메시는 그저 일반인일 뿐이다. 그리고 메시는 잘생기거나 키가 크지도 않아서 인기도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메시는 천재적인 드리블과 마무리 능력을 가지고 있고, 호날두는 축구에 관한 모든 능력을 다 가지고 있는 매우 ‘희소한’ 인간이기에 우리는 그들을 동경한다. 명문대에 대한 부러움도 같은 원리로 설명할 수 있다. 명문대는 극소수만이 경쟁을 뚫고 입학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그곳에 속한 사람들은 높은 지능, 노력, 그리고 성취를 상징하며, 이는 곧 사회적 희소성을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존경하며, 부러워하고, 때로는 그들처럼 되고자 노력한다. 이 희소한 가치는 단순히 학력의 문제를 넘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적 자본으로 기능하며 더 큰 가치를 창출한다. ‘밴드 웨건 효과’도 이러한 동경에 영향을 받았다. 사람들이 동경하는 대상에 대한 소비를 하면, 나자신도 동경하거나 그에 뒤쳐질까봐 따라서 소비를 하는 등, 자본주의라는 것은 단순히 돈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감정적이고 비이성적인 요소도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차별이라는 것은, 밴드웨건 소비나 베블런 효과가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자본주의 사회가 건재한 한, 차별을 없앨수는 없다. 우리가 노가다를 동경하는가? 그들이 한 달에 1500만원을 번다고 해도, 그의 3분의 1을 버는 대기업 월급쟁이를 동경한다. 그리고 노가다꾼이 번 돈으로 주식을 해서 건물을 사도, 졸부라고 욕을 한다. 하지만 대기업 월급쟁이가 대출로 집을 사면, 건실한 사회인이라고 칭찬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지표라고 했는데, 결국 돈보다 다른 지표가 우리를 평가하고 있다. 이런 지표 역시 자본주의에서 나온 것이다. 인간이 희소함에 끌리는 것은 본능이고, 이는 자본주의의 핵심이다. 또 이는 자본주의를 탄생시킨 것이기도 하다. 결국 차별을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희소함에 끌리고, 조금이라도 희소해지기 위해서 살아가니 말이다. 반대로 말하면, 이는 사회적 발전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자본주의 사회가 유지되는 것이다. 우리가 수많은 차별 속에서, 돈으로만 다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모순을 견디고 있음에도 말이다.
차별이 싫은 것도 맞다. 하지만, 그들에게 조금이나마 더 다가가고 싶었다. 내가 사우디 알 나스르 경기를 직관가서, 버스에서 내리는 호날두에게 사인과 사진을 요청하고 내 영어 이름을 알려주면, 호날두가 까먹을지 안 까먹을지는 모른다. 아마 수 많은 팬들의 이름을 기억해야 해서 까먹을 수도 있고, 인성이 좋은 호날두는 나를 기억해 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나는 사우디에 갈 돈도, 명예도, 재력도 없다. 그렇기에 집에서 그 부족한 재력을 탓하며, 위대한 인간인 호날두에게 조금이라도 다가가기 위해서 나이키 머큐리얼을 억지로 발에 맞춰보고, 알-나스르 어센틱 유니폼을 산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가짜 이데아 속에서 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조금이라도 더 희소해지기 위한 투쟁 속, 희소한 인간들을 바라보면서 말이다. 우리 사회는, 이제 인정 투쟁이 아니라 ‘희소투쟁’ 인지도 모르겠다. 조금이라도 더 희소해지기 위해 몸부림치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