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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리콥터 부모

by 제이티

김민하




헬리콥터 부모는 자녀에 대한 과도한 보호와 개입이 자녀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독립적인 개체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자율성과 자유를 억압하는 현상을 뜻한다. 헬리콥터 부모는 부모가 자녀를 너무 과잉보호한 나머지 자녀의 선택을 존중하는데 있어 부모가 자녀 대신 선택하는 경향을 보인다. 헬리콥터 부모는 자녀가 내적으로 스스로의 법칙을 세워 자아를 만들어가는 행동 능력을 박탈한다. 철학자 칸트는 자율성을 도덕적 법칙에 의해 자신을 규율하는 능력으로 정의하였다. 그러나 부모의 과잉보호는 아이의 자율성을 기르는 데 다소 방해가 된다.


''왜 우리 애한테만 그래요?'' 아마 학교에 들어온 민원 중 절반은 이런 말들이지 않을까 싶다. 헬리콥터 부모는 경쟁과 편승이 솟구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이들을 지키기 위한 심정을 가진 부모들로 대부분 아이를 과잉보호하고 피해의식이 크다. 너무 과도한 애정과 사랑일 수 도 있겠다. 내 소중한 아이를 절대 털 끝 하나라도 건드리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마음. 하지만 과잉보호가 적절한 시기를 넘어서 계속될 시 성장하는 아이에게는 오히려 위협이 될 수도 있다. 난 아이가 엄마 껌딱지인 3~4살 시기에는 헬리콥터 부모가 나쁘지 않다고 본다. 이 시기에 아이들은 스스로를 절제하고, 내면에서 자율성 있는 규율을 만들 능력이 없다. 단지 밥 주고, 놀아주고, 재워주는 엄마가 필요한 시기이다. 이럴 때 헬리콥터 부모는 안전과 관련된 방면에서 봤을 때 필요한 엄마일 수 도 있다. 하지만 아이가 사춘기에 들어가는 시기까지 아이를 놓지 않고 있으면, 그건 아이의 자아를 압축시키고, 자존감을 떨어트리게 된다. 즉, 과도한 사랑이 아이를 망치고, 자율성을 억제하며, 독립적인 개체가 되어 살아가야 할 미래와 앞으로 해야할 의사결정과 수많은 선택들을 할 힘을 길러주지 못하는 것이다.


아이는 실패와 경험을 통해 스스로의 길을 개척해나가고 자율적인 존재로 성장해야 한다. 철학자 칸트와 루소, 롤스도 자율적 성장을 위한 자유를 중요시 여겼다. 헬리콥터 부모의 지나친 개입은 자녀에게 오히려 독이 되어 자율적 성장을 방해할 수 있다.


헬리콥터 부모의 과도한 개입은 자녀의 성장에서 여러 방면으로 해를 끼친다. 먼저, 학교에서든, 집에서든 선택을 해야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반장 선거를 뽑는다고 치면, 헬리콥터 부모의 자녀는 이제껏 부모가 선택해준 대로 먹고 입고, 따르다 보니 누구를 뽑아야 할지 혼란이 올 수 있다. 믿음직스러운 반장 후보를 뽑는 데 있어서 선택을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물건을 사는 데 있어서 무엇이 더 좋은 건지 판단을 못할 수 도 있다. 헬리콥터 부모의 아이는 부모가 산 옷만 입고, 부모가 정한 음식만 먹으며 주어진 환경에서의 삶만을 안일하게 유지해나갔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밖에서 친구들과 떡볶이를 사먹으려니 비싸지만 배불리 먹을 수 있고, 직접 만들어 먹을 수 있는 떡볶이 집 두끼를 가는 것이 좋을 지, 싸고, 맛있지만 서서 먹어야 하는 길거리 떡볶이 집을 가는 것이 좋을 지 판단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스스로 알아가는 데 있어서 어려움을 겪는다. 헬리콥터 부모의 아이가 이번엔 부모 없이 친구들과 놀이공원에 왔다고 해보자. 아이는 엄마 손을 잡고만 있으면 금방 롤러코스터를 타러 갈 수 있고, 금새 자이언트 스윙을 탈 수 있는 따라가기식 세계에 적응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딸랑 지도만이 주어지니 엄마 손을 잡고 있을 때는 금방 찾았던 롤러코스터가 안 보이고, 인디아나 존스는 분명 지도 상에는 표시되어 있는 데 도무지 안 찾아지는 것이다. 아이가 스스로 내면을 발굴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부모의 개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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