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호림
전 세계 자살률 1위에, OECD 국가들 중 최하위권의 행복지수를 기록한 국가, ‘대한민국’.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참 여러 방면에서 대단한 국가라는 것을 느낀다. 30-50 클럽이라는 말은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불 이상, 인구가 5천 만명 이상인 나라를 일컫는 말로, 지구 상에서 대한민국을 포함한 일곱 국가만이 이 그룹에 속해 있다. 더 나아가, 스웨덴의 연구소가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이 7개국 중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1위라는 결과를 도출해냈다. 여유롭고, 돈도 많고, 민주주의적인, 겉에서 보면 완벽하고 행복한 국가지만, 정작 다크서클이 볼 바로 위에까지 내려온 직장인들, 노력해도 뽑아주질 않는 취직으로 고통받는 불쌍한 대학생들, 심지어 ‘6살 의대반’에 속해 작은 고사리 손으로 늦은 시간까지 연필을 쥐는 어린이들이 이 국가의 현실이다. 더 무서운 것은,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이 불행과, 힘듦, 고통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새벽까지 불빛이 요란한 거릿속 학원을 빙빙 도는 어린 학생들은, 이제는 책가방이 아닌 캐리어에 문제집을 싣고 이동한다고 한다. 그럼에도 묵묵히 학원을 이동하는 차 안에서 햄버거를 크게 한입 베어무는 어린 청소년들, 퇴직을 한 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밀려오는 허무함과 공허함에도 나라 탓 한 번 하지 못하고 그저 자신의 생을 조용히 마감하는 노약자들.
광화문 앞에 모여, 삼삼오오 타오르던 촛불들은, 그 무엇보다도 아름다웠다. 그 무엇보다 민주적이었다. 하지만, 집회가 끝나고 타오르던 불빛이 녹아내리면, 회사에서 갑질을 일삼는 상사요, 학교에서 정해진 답만을 고집하는 교사요, 가정에서 자신 말만이 맞다고 떵떵거리는 아버지였다. 결국, 대한민국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민주주의자 없는 민주주의가 아닐까, 광화문에서 빛났던 광장 민주주의의 불꽃은 너무나도 아름다운데, 정작 일상적인 민주주의는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은 모래성, 아니, 이미 쓰러진 취약한 상태로, 이 모든 것은 정말이지 모순적이었다. ‘정상성의 병리성’, 너무나도 병든 사회에서 아무런 일이 없다는 듯이 ‘정상’으로 사는 사람은, 과연 정상인가 비정상인가?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짧지만 어딘가 굵으면서도 부드러운 이 문장은, 불행을 너무나도 당연히, 너무나도 익숙히 받아왔던 한 청소년이자, 대한민국의 한 국민의 작은 마음을 울린다.
어느 날, 해가 지고 어둑어둑한 시내 속 엄마의 차 안에서, 나는 처음으로, 대한민국이 밉다고 엄마에게 말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공통수학을 마치지 않으면 들여보내주지도 않는다는 영재고 입시반, 고등 입시에도 새벽까지 밤을 새고 공부하며 철저한 준비를 일삼는다는 내 또래의 학생들, 나도 잘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나도 잘하는 줄 알았는데 알면 알수록, 똑똑해지면 똑똑해질수록 멍청해지는 내 자신이 미웠다. 오랜만에 쇼파에 앉아 내가 요즘 가장 좋아하고 보면 행복해지는 드라마 도깨비를 보면서도, 공부를 하다 틈틈이 친구들의 연락에 답을 하면서도,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지긋이 눈을 감으면서도, 나의 인생에서 소소하면서도 즐거운 행복을 누릴 때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죄책감과 불안이 나를 압축해왔다. 우리는 행복할 권리도 없는 것일까?, 독일에서는 대학도 무료고, 독일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들은 대학을 다니지 않아도 잘 먹고 산다는데, 직업 없고 돈 없으면 무시와 멸시, 사회의 벼랑 끝에 몰리는 이 사회와 달리, 또다른 기회가 눈 앞에 나타난다는 지구 반대편의 어딘가, 나의 인생은 원샷인데, 그들의 인생은 열샷인 것을 보며, 처음으로 나 자신에게가 아닌, 이 사회와 국가에게 화가 난다. 대한민국의 나라에서 이렇게 극단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은 끝없는 경쟁 때문이고, 이 경쟁이 가장 활성화된 공간은 다름아닌 학교, 교육 시스템 속이다. 내 점수가 곧 나의 쓸모가 되고, 그 빌어먹을 숫자가 내 인생의 순위가 되는 이 공간. 이제 나와 내 친구들은, 서로와 수다를 떨고, 설빙을 먹는 사이가 아닌, 그저 서로를 질투하고, 짓밟으려하고, 박탈감을 가장 크게 느끼게 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사실 경쟁이라는 게, 결코 나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경쟁이란, 삶의 원동력이 되어주기도 하고, 촉진제가 되어주기도 하는,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 삶에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하지만 왜 우리 사회는 경쟁이 극단적으로 심화되었고, 이 경쟁이라는 필수적인 수단이 대한민국의 불행으로 자리잡은 것일까? 사실 어떤 교육이 필요하고, 복지를 향상시키고 안 시키고의 논쟁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스타벅스에 간다고 가정해보자. 맛도 차이가 별로 없고, 가격이 훨씬 싼 메가커피가 아닌, 스타벅스를 가는 사람들의 심리는 무엇일까? 메가커피에서 휴대폰을 보면서 음료수를 홀짝 홀짝 들이키는 사람이 아니라, 맥북을 펼치고 스타벅스 2층 테이블에 앉아 케이크 하나, 음료수 하나를 천천히 즐기는 사람의 차이, 이는 남들에 대한 시선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아주 사소한 삶의 순간순간에서도 남의 시선을 지나치게 신경쓴다. SNS의 발달로 남과 나의 삶을 비교해보는 것이 일상이 되었고, 조금 더 고급져보이는 삶, 조금 더 유한계급 같아 보이는 삶을 살고픈 갈망에 사로잡혀 살아간다. 타인의 가장 아름다운 삶의 일부분과 자신의 전체적인 삶을 비교하다보니, 경쟁은 심화되고 사람은 점점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토론하는 수업이 아니라, 복지 수준을 향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 속 변화라고 생각한다. 메가커피를 마셔도 아무렇지 않게 매장 앞에 앉아있을 수 있는 여유, 지방대를 나와도 지방대를 나왔다고 소개할 수 있는 용기, 명품을 하나 걸치지 않고 시장에서 산 보세 가방을 매도 당당하게 자신을 뽐낼 수 있는 자신감, 다이소 틴트를 써도 내가 가장 예쁘다고 생각할 수 있는 뻔뻔함, 결국 우리에겐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뽐낼 수 있는 당당함이 필요하다. 이 사회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데, 이 사회가 나를 불행하게 만들었는데, 쇼펜 하우어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는 행복은 결핍이 충족되어 잠깐 느낄 수 있는 감정이라고 주장하며,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기 때문에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쇼펜하우어는 행복을 추구하기보다는 고통을 줄여나가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우리가 사회를 미워하고 국가의 허점을 찾기 보다는, 우리 자신을 먼저 건강하게 개선해보는 것이 중요하고, 이가 주는 효과가 경쟁이건, 자살률이던, 행복률이던 가장 크게 작용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국가의 허점을 찾고 정책을 생각하기 전에, 우리 자신에 대해 더 생각해보면 어떨까? 사회가 나의 자아를 강하게 만들어주리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 스스로 강한 사람이 되는 것이 행복을 찾는 첫 단계 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