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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를 아는 건 유일하게 이름 뿐이니까.

by 제이티

조가람



학교를 가는 이유도, 내가 운동을 하는 이유도, 내가 음악을 사랑하는 이유도, 내가 남들에게 배려를 하는 이유도, 솔직히 살아가는 이유조차도 모르겠다. 세상이 단편적으로 보는 나는, 그저 해솔중학교 20828 조가람일 뿐이니까. 아무리 작고 미묘한 변화를 만들려고 노력을 해보아도, 내게 주어진 그 미묘한 변화는 내 피, 땀, 눈물을 쏟아가며 노력한 하루가 아니라, 그저 학번 이였다. 우리는 나이를 먹을수록, 새로운 학년을 맞이해 갈 수록, 그저 행복한 학교 생활은 상상도 되지 않은 채, 내게 주어진 학번을 받아드린다. 이젠 나는 채념한 채로 내게 주어질 학번을 기다리고 있다. 내가 또 어떤 학번으로 불려질지. 내가 또 어떤 답이 정해져 있는 시험지를 풀며, 그 시험에 적게 될 내 학번이 무엇일지. 학교를 졸업하더라도, 내 이름 앞에 계속 붙고, 나를 대표할 그 숫자가 무엇일지 말이다.



한국을 관광하고, 한국인들과 대화를 섞어보고, 한국의 문화를 겪어본 외국인들은 말한다. “ 한국은 경쟁이 너무 심해요. ” 라고 말이다. 사실 맞는 말이다. 우리는 나이를 먹고, 학년이 변하고, 점점 더 어려운 공부를 할수록, 우리는 경쟁의 벽에 치이고 만다. 처음에는 단순히 즐겨타던 범범카가, 이젠 우리가 살아가고, 살아남아야 하는 곳이 되어버렸다. 단순 호기심에 타버린 범범카는 우리에게 경쟁에 놓이게 만들고, 우리는 극단적이고 공격적이게 만들며, 우리는 형식적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그 속에서 범범카를 타는 모든 아이들은 1등 이라는 성적의 상위권만을 바라본다. 누구 한명이라도 죽어도 당연해질 것만 같은 교육의 잔인함은 점점 학생들은 경쟁의 구렁텅이로 빠트려, 점점 자신들이 누구인지, 자신들이 왜 살아가는지에 대한 이유를 지워버리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경쟁하면서 불려질 학번 이라는 범범카의 숫자는 곧, 나의 이름이 되고, 이름을 까먹어버리는 나는,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와, 미래의 나와 싸우며, 남들과의 싸움과 동시에, 나 자신의 싸움에도 처절하게 지고 만다. 그것이 경쟁이 불러오는 학생들의 고통과 아픔, 좌절의 시작이였다.

대한민국의 남한은 민주주의이다. 나의 목소리를 통한 반영으로 만들어가는 세상, 나의 투표로 뽑혀지는 대통령, 즉, 내가 말할 권리가 있는 것 말이다. 하지만, 집에서는, 학교에서는, 학원에서는 우리에게 민주주의라는 권리가 존재할까? 아닐 것이다. 집에서는 엄마 라는 독재자가 존재하고, 학교에는 선생님이라는 독재자와, 우리의 의견과 목소리, 생각을 억제하는 규칙과 오선다지 라는 규율이 존재하며, 학원에서는 그저 진도만을 바라보고 다른 이들의 피드백 따위는 중요하지 않은 순환적인 구조가 존재할 것이다. 정치와 국가가 민주주의 라면, 일상 속 우리도 민주주의여야 하는거 아닌가? 하지만, 모순적이다. 이는, 경쟁에서도 그렇다. 누가 경쟁에 참여하고 싶어서 경쟁을 하는가? 아니다. 그냥 눈을 뜨고, 걸음마를 떼고, 초등학교라는 첫 공동체 속 구성원이 되면 그때부터 우리의 경쟁은 막을 올린다. 치열하고, 열기가 들끓고, 피가 흥건해지는 잔인하고도 고통스러운 경쟁 말이다.



이젠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다. 경쟁 국가이다. 하지만, 이 경쟁에도 많은 동기가 존재할 것이고, 우리가 알지 못했던 다른 얼굴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이 경쟁은 나를 만들어낸다. 이게 무슨 말일까. 우리는 시험이라고 한다면 객관식에 정해진 답을 고르는 것 정도라고 표현 할 것이다. 우리는 그저 교과서를 외우고, 교과서 문제를 돌려가면서 풀고, 시험 유형을 간파하기만 하면 객관식 문제를 푼다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외우는 것이 공부일까? 아니다. 점점 학생들의 공부를 암기로 대체하는 지금, 경쟁의 주된 종목은 암기이다. 단순히 문제를 맞히는 것이 아닌, 암기를 통한 경쟁 말이다. 그렇기에, “ 와, 쟤는 이번에 평균 99점인거 보면 공부 엄청 열심히 하고 잘하겠다. “ 라는 문장에서 열심히 공부한다는 말은 열심히 암기를 한다는 뜻이고, 공부를 잘한다는 말은 암기를 잘한다는 말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기에, 피 튀기는 이 전쟁 속, 우리가 살아남을 방법은 암기. 그리고 그 암기는 학생들의 자아를 대신하여 머릿속에 자리잡아, 학생들의 시선을 세상이 나를 바라보는 것처럼 단편적이고 형식적으로 교정시켜버린다. 그렇기에, 지금의 우리가 하는 경쟁이 쓸모없는데도 목숨을 거는 이유는, 경쟁이 만들어낸 우리의 환상이자, 거짓된 목표 때문이다. 경쟁에서 살아남아야만, 나는 20828 조가람 이라는 학번에서, 공부 잘하는 조가람 으로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여자애들은 화장품과 화장에 목숨을 걸지 않는가? 내가 여기서 가장 좋은 화장품을 쓰고, 내가 가장 화장을 잘해야 20828 조가람 이라는 학번에서 화장 잘하는 조가람, 화장품 좋은 거 쓰는 조가람 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기 때문이다. 내 이름은 따로 있는데. 조가람이 내 이름인데. 우리는 자꾸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를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조금 더 깊게 말하자면, 이름도 우리가 정하고 싶어서 정한 것이 아니다. 내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닌 것처럼, 이건 내가 원하는 이름이 아닌데 내가 이름이 되어있고, 나를 대표하는 한 단어가 되어버린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름을 결정하는, 자세하게 이름 앞에 수식어를 결정하는 경쟁에서 학번이라는 지긋지긋하고 구시대적인 이름표를 떼고, 새로운 이름표를 얻기 위해 자꾸 공부하고, 자꾸 경쟁하고, 자꾸 싸우게 된다. 그것이 학생들이 마주하는 교육의 실제이자, 어린 나이에 경험하는 신분제의 잔인함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민주주의, 즉, 선택할 권리이다. 우리는 이미 정해져 있는 선택지 앞에서 망설일 필요가 없는데도 망설인다. 이번엔 내가 선택하게 되지 않을까 라서 시작되는 믿음 때문일까? 솔직히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나도, 내가 수학학원에 다니게 될지, 과학학원에 다니게 될지, 영어학원에 다니게 될지 이미 결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도, ” 음, 괜찮을 것 같아 “ ” 싫어 “ 와 같은 답변을 내놓고 또 실망을 겪는다. 지금의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유가 아니다. 선택할 권리이다. 내가 이 스케치북에 어떤 색깔과 어떤 펜으로 이 그림을 그려나갈 것인지, 그리고 그 그림의 형식을 어떤 식으로 그릴 것인지 말이다. 세상에 아름다운 공식은 없다. 그저, 아름다운 것처럼 포장해 버릴 뿐이다. 우리의 인생은 공식이다. 그 답이 설령 미지수라고 하더라도, 공식 속 또 다른 미지수에 내가 결정하지도 않은 선택지를 대입하면, 답은 거짓말 처럼 깨끗하고 정확하게 나온다. 나는 그런 인생이 싫다. 우리는 아직 어리다. 무언가를 잃기에도 어리고, 무언가에 상처를 받기에도 어리고, 이토록 치열한 경쟁을 하기에도 너무 어리다. 우리는 본능과 도덕 사이에서 자아를 찾으라는 말을 많이 듣지만, 자아를 찾자라는 또 다른 형식을 만들지 말자. 그저 이 눈 밭 위에, 내가 무엇을 할 것 인지 부터 선택하자. 눈 위에 누울 것인지, 눈싸움을 할 것인지, 눈사람을 만들 것인지. 그냥 내가 눈을 보고 하고 싶은 것을 말이다.



나도 나를 모른다. 내가 지금 왜 이런 공부를 하는지, 내가 왜 이런 것을 하고, 이런 노래를 듣고, 이런 춤을 추고 싶고, 이런 책을 읽고 싶은지 하나도 모른다. 나도 나에게 아는 것은 단 한개도 없지만, 내가 나의 대해서 유일하게 아는 것 하나는 ” 이름 “ 이다. 우리는 이 이름을 끼워맞춰서도, 포장해서도, 지워버려서도 안된다. 이 이름까지 잃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경쟁이라는 유바바에게 이름을 빼앗기고, 또 학번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야 되니까. 그니까, 남겨두자. 더럽히지 말자. 우리가 지금 지켜야 할 것은 우리의 순위권이 아니라, 내가 유일하게 알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내 ” 이름 “ 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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