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몸을 보다 완벽하게 해부학
보티첼리의 비너스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분명 아름다운 그림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뭔가 자연스럽지 않은 부분이 있다. 특히 목에서부터 아래로 처진 어깨 부분과 파리 그리고 손이 특히 어색하다. 모델의 자세와 상관없이 일부러 왜곡해서 아름답게 그리려고 했을까? 일부러가 아니다 제대로 그리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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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두 명의 거장이 등장한다. 원근법을 터득하고 캔버스를 창문으로 만들었던 르네상스 사람들의 두 번째 도전은 과연 무엇일까? 창문 넘어 바깥이 아닌 이제 “그 속”을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바로 하나의 우주라 할 수 있는 인간의 몸을 탐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1489 밀라노의 어느 건물에서 한 손엔 칼 다른 손엔 연필을 든 남자가 누워있는 사람 옆에 다가간다. 칼을 든 그 남자의 표정에서는 분노와 증오의 감정을 찾아볼 수 없다. 호기심과 고뇌로 가득한 그의 직업은 무엇일까? 사람을 살리는 의사인가? 하지만 이미 누워있는 남자는 숨이 끊어진 지 오래다. 그렇다면 이 남자는 무엇을 하려고 다가가는 것일까?
칼과 펜을 든 남자는 레오나르 도고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게 아니라 더 자세히 알기 위해 다가갔다.
바로 시체를 “해부”하기 위해
1490년 어느 날 메디치 가문의 저택 안에 많은 사람들이 숨죽인 체 한 사람의 손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날카로운 칼로 시체를 피부를 열어 장기를 설명하고 있었다. 이 모임은 피렌체의 지배자 로렌초 데 메디치의 주관으로 열린 비밀 해부 강의였다. 비공개 멤버로 진행된 이 “요사스러운” 모임 안에 한 젊은 청년이 범상치 않은 눈으로 뚫어지게 시체를 쳐다보며 무언가 끄적거리고 있다.
바로 이 남자는 미켈란젤로다.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르네상스의 위대한 거장이 해부에 몰두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해부하는 일은 교회에서 엄격하게 금지하는 행동이었다. 많은 지식인들이 호기심과 관심의 대상이었으나 누구도 쉽게 시도할 수 없는 금단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흑사병이라는 대재앙을 만나자 교황도 어쩔 수 없이 시체 해부를 허락했던 것이다.
해부학 강의는 인체에 있었던 수많은 궁금증을 해결해 주었다.
움직임 생명 탄생과 죽음의 비밀 질병의 원인 등등 수많은 궁금증에 대한 열망 중 과연 해부는 어떻게 미술의 영향을 끼쳤을까?
운(?) 좋게 마음껏 죽은 사람을 보고 난 이 거장들은 어떠한 작품을 남겼을까?
다빈치와 미켈란젤로가 주목한 부분은 바로 근육 와 인대와 피부조직이었다. 화가가 근육을 이해하면 어떠한 결과가 나올까? 얼굴의 표정과 이를 움직이게 하는 근육의 비밀을 풀자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 시작한다.
바로 다빈치의 <다비드>를 보자. 해부학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이렇게 완벽한 비율과 섬세한 근육 묘사가 불가능했다. 특히 눈빛과 미간의 주름만으로 마치 살아있는 조각처럼 느껴지게 하는 세상사의 근심마저 표현하지 않은가?
다빈치의 대표작 모나리자는 보면 그는 단순히 화가로만 볼 수가 없다. 수 없이 많은 죽은 자의 ‘속’을 들여다본 후에 그림에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은은하고 묘한 표정을 봐라. 분명히 미묘하고 색다르고 다른 그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무언가 매력이 있는데 말로 표현이 안 된다. 루브르 박물관 최고의 수입원의 비밀은 바로 인체에 대한 치밀한 연구 “해부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녀의 미소는 얼굴에 40개 이상 근육의 움직임을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단순히 그림이 아니라 다빈치는 본인이 알고 있는 해부학의 지식을 마음껏 뽐내기 위해 그린 게 분명하다.
은은하게 근육의 움직임을 나타냈던 다빈치와 다르게 미켈란 젤로는 그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마치 농구코트 위에 조던 같은 드리블을 보여주기로 했다.
<톤 도도니>에서 보면 아기 예수를 끌어 안기 위한 성모 마리아의 팔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팔과 손목에서 이어지는 인대의 움직임과 표정 그리고 앉아있는 자세에서 허리를 돌리는 자세와 발가락의 각도마저도 사진보다 자연스럽다.
일부러 따라 그리기 어려운 자세만 그린 것처럼 마치 조각상을 나타낸 것 같은 그의 그림.
이러한 그림은 ‘눈’으로 보고 그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바로 ‘해부학’이라는 마법의 키워드가 필요한 것이다.
이제야 서양 그림을 보고 있으면 왜 그렇게 홀딱 벗고 있는 그림이 많은지 궁금증이 풀린다.
그것도 여자가 아니라 남자의 몸이 필요 이상으로 등장한 이유는 바로 해부학적 스킬을 맘껏 뽐내기 위한 것이었다.
원근법은 ‘공간’을 해부학은 ‘인체’ 이 두 가지 퍼즐은 이제 잘 그린 그림의 기준이 되기 시작한다. 미술학원 가면 데생을 하고 스케치를 하고 한쪽 눈을 감고 하는 것도 이때 만들어진 기준이 된다.
우리는 이 미술 사조를 고전 미술이라 쓰고 르네상스라 부르기 시작한다.
자연스럽게 고전 미술에서는 선이 색채를 지배하기 시작한다. 왜 미술시간에 열심히 스케치는 했는데 물감 칠하다 보면 망하지 않는가? 색채는 어디까지나 선의 지배 안에 있어야지 도드라지고 사실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 중심의 미술을 아카데미라 하고 아직도 우리는 선을 잘 이용한 그림은 잘 그린 그림이라고 생각한다. 그 기준을 만든 남자는 바로 다빈치와 미켈란젤로다.
다시 앞에서 본 보티첼리 <비너스의 탄생>를 보자. 왜 어색하게 그렸는지 답을 알 수 있다. 이는 화가의 탓이 아니다. 만약 흑사병이 없었다면 해부도 없었을 것이고, 우리는 위대한 두 거장을 교과서에서 만나 볼 수 도 없었을 것이다.
그가 한 세기만 늦게 태어났다면 이렇게 그렸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