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음을 더해주는 어둠

# 바로크 미술 #명암법

by 제이티

뒤러의 판화의 주인공은 유명한 종교학자 예리니 모다. 예리니모는 히브리어를 라틴어로 번역해 성서의 틀을 만든 사람이다. 광야의 시간에서의 고행과 죽음에 대한 성찰, 사자에 발에 박힌 가시를 빼주는 등 판화의 내용은 그의 모든 업적을 다루고자 하는 듯하다. 작은 화면에 빈틈없는 묘사와 화면 구성이 돋보이고 원근법과 해부학 유화까지 이미 클래식을 완성시켰던 그의 실력은 감탄을 자아낸다. 하지만 빽빽이 들어간 있는 그림 속에 무언가 허전한 느낌이 든다. 무엇하나 놓친 게 없지만 그렇다고 특별한 것이 보이지도 않는다.


과연 이 부족한 게 없어 보이는 그림에 부족한 게 무엇일까?


어둠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분명히 알 수 없지만 확실히 느낄 수 있는 건 그가 진정으로 후회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평생 기괴한 성격으로 인해 각종 폭력과 사건 스캔들이 끊이지 않았던 그의 삶을 돌아보면서 남겼던 이 그림 한 장으로 그의 과거를 용서할 수는 없겠지만 그의 마음은 충분히 공감이 간다. 카라바조 라 불리는 남자. 원래 카라바조는 그가 살던 동네 이름이고 본명은 따로 있었으니 함부로 쓸 수 없었다. 대선배 미켈란젤로와 같기 때문이었다. 대선배 미켈란젤로는 천재라는 수식어가 부족하게 느껴질 만큼 대단한 화가였지만, 후배 미켈란젤로 역시 선배 못지않게 미술사에 굵직한 획을 남겼다.


탁월한 묘사 능력에 거기에 빛과 어둠의 강렬한 대비를 즐겨 그린 그의 화법은 많은 사람에게 그의 죄를 미워할 순 있어도 그림마저 미워할 수 없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공간감은 놀라울 정도로 자연스러웠고 빛을 받은 주인공은 뇌리에 각인될 만큼 강렬하다.


[의심하는 토마] 작품을 보면 후광효과가 없고 이들은 실제 찢어진 어부의 의상을 입고 있다. 이 작품의 포인트는 예수의 찔린 옆구리와 의심하는 토마의 표정이다. 바로 이 부분이 돋보이게 조명이 비치고 있다. 극적인 몰입감과 사실적인 그림을 추구하는 그의 작품에서는 이전 르네상스에선 볼 수 없었던 감동과 울림이 느껴진다. 르네상스가 낮 12시 같은 평온함과 안정감을 주었다면 바로크는 밤 12시처럼 마치 무언가 일어날 것만 같은 느낌이랄까?


대선배 미켈란젤로의 <사울의 개종>과 카라바조의 <사울의 개종을>을 비교해보자.

카라바조 vs 미켈란젤로

미켈란젤로의 그림은 사건의 현장을 매우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특유의 힘과 생명력이 있지만 카라바조랑 비교해 보면 어딘가 부족해 보인다. 모든 것을 보여주려고 하다 보니 정작 중요한 게 무엇인지 안 보인다. 모든 것을 나열하는 느낌이 강한 반면 카라바조의 그림은 시선을 확 끌어당기고 이내 마음을 뺏어 가는 묘한 힘이 있다. 바로 여기에 카라바조가 그간의 숱한 추문에도 여러 번 사면받을 수 있었던 비결이 나온다.

카라바조의 작품을 예술로서 바라보지 않고 정치적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교회 권력자들이었다. 16세기 전반으로 거슬러 가면 유럽 전역에서는 종교개혁을 넘어 피비린내 나는 종교전쟁이 휩쓸고 있었다. 쉽게 말해 신교의 도전을 받게 된 챔피언 가톨릭 교회는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대주교 가롤로 보로메오는 강력한 리더십으로 교회를 다시 세우는데 착수한다. 대다수가 문맹인 신자를 모으는 데 카라바조만 한 그림은 없었다. 신교가 루터의 성경 번역으로 많은 사람에게 성경을 읽을 수 있게 해 주었지만 여전히 글을 못 읽는 신자들이 많았다. 썸네일만 보고 유튜브 영상을 클릭하듯이 그런 자극적이고 사람의 가슴을 당기는 그림이 필요했다. 예나 지금이나 글보다는 이미지가 더 끌리는 법이다.

“화려해선 안 되고 단순 명료해야 한다. 신앙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그 무엇보다 가슴을 파고드는 힘이 있어야 한다.”

2010년 카라바조의 유해가 발견했다는 보도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유전자 검사를 통해 발견된 사실은 그가 심각한 납중독 상태로 죽었다는 것이다. 당시 화가들은 흰색 안료에 들어가는 납에 오래도록 노출되어 있었다. 그 부작용으로 두통, 복통, 불면증과 정신착란, 폭력성 같은 정신적 증상도 있었다. 만약 이 발굴이 사실이라면 그가 저지른 악행이 그의 성격이 아니라 그의 질병일지도 모르겠다. 음식은 만든 사람을 닮듯이 그림도 화가를 닮긴 마련이다. 바로크를 대표하는 그의 작품을 통해 마치 ‘빛과 어둠’처럼 화려하면서도 초라한 그의 삶을 엿볼 수 있다.


빛과 어둠의 대비를 강하게 사용한 카라바조의 명암법은 원어로 키아로스쿠로라고 한다. 키아로는 빛을, 스쿠로는 어둠을 뜻한다. 풍부한 색채, 두터운 물감, 과감한 붓질, 짙은 어둠에서 살며시 배어 나오는 빛, 그리고 얼굴에 담긴 인생의 깊이까지,


그도 키아로스쿠로를 자연스럽게 익혔지만 카라바조와 확실히 달랐다. <엠마오의 저녁 식사>를 보면 예수의 실루엣만 보이는데도 마치 태양을 잠시 가린 일식처럼 은은하면서 숭고한 느낌이 든다.

오로지 검은색만으로 어떻게 이런 표현을 할 수 있을까? 그는 조명의 위치와 세기에 따라 빛과 그림자가 빚어내는 효과를 치열하게 연구했다.


그의 초상화 작품을 보면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운 작품이 많다. 그윽하면서도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그는 조명의 달인답게 후에 렘브란트의 조명이라는 별명으로 더 알려졌다. 왼쪽 눈 아래에 역삼각형 모양의 밟은 부분이 있다. 이것이 적절한 크기가 되도록 조명의 밝기와 위치를 조절해야 한다. 여기에 특유의 두텁고 섬세한 붓터치로 한 남자의 살아온 인생의 무게마저 빛과 어둠 속에 담긴다.


카라바조에 의해 시작된 명암법이 렘브란트에 의해 마무리된다.


강렬한 명암에서 은은하고 깊이 있는 명암까지 인간 내면의 울림과 감성을 자극하는 명암법


이로써 명암법은 고전회화를 완성시킨 네 개의 퍼즐 중에 마지막이 된다. 원근법, 해부학, 유화에 이어 명암법까지 이로써 르네상스부터 바로크까지 고전이라 불리는, 말 그대로 클래식이 완성된다. 원근법 해부학 유화가 사람과 사물을 보다 정확히 완벽하게 그리려고 했다면 명암법은 완전히 패러다임을 바꾸어 놓았다.

세상 모든 것을 담으려는 게 아니라 필요 있는 것만 담고 최대한 필요 없는 것을 빼려고 시도했던 카라바조와 렘브란트 덕분에 이제 중요한 것을 선택해 강조하는 그림이 나올 수 있었다.


“이제 화가가 의도한 바를 전달할 수 있는 그림”



다시 뒤러의 판화를 살펴보자. 창문에 스며드는 은은한 조명으로 우리는 성인의 모습에만 집중할 수 있다. 사색에 잠긴 것 인지? 고통스러워하는 것인지 굳이 그의 명암을 내밀지 않아도 그의 어두움과 빛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내면의 울림을 알려주는 은은한 빛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걸 다 그리려는 르네상스에게 바로크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무조건 열심히 보다는 먼저 왜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라고 말이다.

명암법으로 이제 화가들은 우리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공간을 깊이 있게 완벽하게 통합하고 우리의 마음을 흔드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https://youtu.be/Y0P6fBT51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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