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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개구리 Apr 25. 2019

엄마가 가시던 날 : 죽음에 대하여

저도 제 인생은 처음입니다.



서서히 꺼져가는 맥박소리. 엄마는 이미 의식 없는 채로 며칠을 거친 숨소리만 내쉬었다. 그러다 모두가 잠든 새벽, 드라마에서 보던 것처럼 엄마의 바이탈 사인은 점점 작게 그리고 점점 뒤로 밀리듯 천천히 뛰고 있었다. 직감적으로 엄마 손을 잡고 긴박하게 인사를 하고 몇 번이고 엄마를 끌어안고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러다가 큰누나가 비명을 질렀다. 바이탈 사인 모니터에 평행선이 그려졌다. 엄마의 심장은 멈춰있었다.

심장은 멈췄어도 아직 청력은 남아있다는 간호사의 말이 기억났다. 그리고 나는 엄마를 손을 잡고 볼에 비비며 엄마에게 사랑한다고, 고생했다고, 우리 앞으로 더 잘 살 테니 걱정 말라고 이야기를 해줬다.


새벽시간이라 엄마의 임종은 큰누나와 나만 지킬 수 있었다. 엄마가 가실 때, 내가 그 자리에 있어서 엄마와 인사할 수 있어서 너무 다행이었지만, 엄마가 가시는 그 장면은 아직도 나를 힘들게 한다. 그날의 새벽만 떠올리면 금방 눈시울이 젖는다. 그 기억이 너무 힘들어서 "차라리 나도 그 자리에 있지 않았더라면, 엄마가 그렇게 힘들게 가시는 모습을 보지 않았을 텐데..." 라며 이기적인 생각도 들기도 했다.


엄마의 장례식을 치르면서 문상을 온 한 형님에게 위와 같은 말을 했더니, 그 형님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게 자식이 짊어지고 가야 할 짐이라고....

맞다. 그 순간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그날의 엄마를 기억하며 엄마를 그리워하고 있다. 그리고 그날 엄마도 나의 배웅을 받으며 편안하게 가셨을 거라고 믿는다.





엄마가 투병 중이실 때 병원에서도 이미 손을 쓸 수 없게 된 상황에 호스피스 병동으로 병실을 옮겼고, 우리 4남매는 간병인을 고용하기 전까지 날마다 교대로 엄마를 병간호를 했다. 병간호가 힘든 것은 날마다 관장하는 것이나 오물을 치우는 것이 아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희망 없는 체로 날마다 보고 있어야 한다는 게 힘든 것이다. 그 절망감이 사람의 진을 빼놓는다. 무표정한 얼굴과 늘 덤덤한 것도 아이러니하지만, 그게 일상이 되면 그렇게 변하더라.  


그때 역시 또 두 가지 마음이 충돌했었다. 아니 충돌이 아니라 이상한 계산을 하고 있었다.

엄마는 언제 돌아가실까. 돌아가시면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떤 감정이 들게 될까? 그럼 나는 뭘 해야 하지? 부고 메시지를 보내야 하나? 누구에게 보내야 하나? 누가 빈소를 찾아줄까? 엄마 친구들에게는 어떻게 연락하지? 등 시시콜콜한 다양한 질문들이 스치면서 어쩌면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런 시간을 몇 달간 반복하다가 엄마는 2018년 4월 12일 새벽에 떠나셨다. 브런치에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로 마음먹은 것 역시 엄마에 대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크다. 또 엄마가 돌아가시면서 형제를 묶고 있던 가족이라는 단어가 조금씩 해체되는 것을 느낀다. 사이가 좋고 나쁘고를 떠나, 부모와 자식관계가 상실되면서 본인의 가정, 각자의 역할에만 자연스럽게 충실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은 오히려 형과 더 시간을 보내려고 하고 있다. 누나들은 결혼을 했지만, 형과 나는 아직 결혼을 안 했기 때문에 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클 테니 말이다.


이 모든 일들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누구나 겪게 되는 일이다, 어쩌면 그래서 더 잔인하고 서글프다.  

38살이면 사회에서 적지 않은 나이지만, 내 인생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늘 처음이기에 언제나 초년생 같다.  사실 나는 내가 어른이라고 느낀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니까 말이다.



<2019년 4월 5일 서른여덟 살 인생 초보 라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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