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ll Backwards, Break Your Nose
서양에서 말하는 머피의 법칙과도 같이 일이 잘 풀리지 않고 꼬이기만 하는 현상을 이르는 속담입니다. 당사자가 아닌 입장에서야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사건 당사자 입장에서는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테지요. 갑작스런 비소식에 집으로 다시 들어가 바리바리 우산을 챙겨 나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갑자기 날이 화창하게 갠다거나, 반대로 다시 우산을 집어 넣었더니 어느덧 비가 쏟아지는 날이 종종 벌어집니다. 더러워진 차를 깨끗하게 세차하고 나오는 길에 쏟아지는 소나기를 만날 때 등 실제로 뒤로 넘어졌는데 코가 깨질 리는 없겠지만 그만큼 말도 안 되는 상황이 계속해서 우연하게 일어날 때 많이들 사용합니다.
고등학교 시절 매우 웃픈-다른 사람이 보기엔 우습기 짝이 없지만 제게는 아주 슬펐던- 한 사건이 떠오릅니다.
고등학교 2학년 시절로 기억을 합니다. 당시 고등학생들은 수업이 끝나면 밤늦게까지 야간 자율학습을 하고 10시가 넘어 집에 가곤 했었죠. 학교 급식이 일상화된 지금의 학생들에게는 매우 생소하겠지만 당시 어머니들은 아이들 도시락을 두 개씩 싸서 매일 아침 챙기느라 다들 고생들을 하시던 시절이었죠.
당시 우리 반의 혈기왕성한 여드름 투성이 사춘기 남학생들에게는 우리만의 비밀스러운 작전이 있었습니다. 아마 다른 반에서도 비슷했을 거라 생각이 드는데, 지금으로서는 매우 생소한 일명 '성인 비디오 테이프 돌려보기 작전'이었습니다.
지금이야 PC나 모바일에서 마음만 먹으면 야시시한 동영상들을 쉽게 접할 수 있고, 또 그런 것이 또 다른 사회적 문제로도 많이 발생하는데요. 당시에는 아이들의 성적 호기심과 궁금증을 해소시켜줄 수 있는 것이 매우 제한적이었습니다. 주변 수퍼나 서점의 가판대에 있는 선데이서울과 같은 주간지들 속의 수영복 입은 누나들을 몰래 보거나, 동네 비디오 대여점에서 어쩌다 운 좋게 빌려 보는 성인용 비디오가 전부였던 시절이었죠.
당시 우리 반에 부모님이 비디오 대여점을 하시던 친구 녀석이 한 명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반에 아주 확실한 공급책이 있던 셈이었죠. 그래서 녀석이 부모님 모르게 성인용 비디오를 한 개씩 가지고 와서 반 아이들에게 얼마(?)씩 받고 빌려주곤 했습니다. 인기가 매우 높아 제 순서까지 오려면 상당히 오래 기다려야 했었죠.
여하튼 어찌어찌 해서 어느 날, 평소와 다름없이 학교에 등교하고 나니 "이제 네 차례야"라며 먼저 빌려본 녀석이 제게 비디오 테이프를 건넵니다.
한참 기다린 데다 너무 궁금하고, 또 밤에 몰래 볼 생각에 마음이 들떠 있었습니다. 이걸 어디다 숨겨서 가야 하나, 생각에 생각을 하던 중 제 머릿속에 문득 완전범죄를 꿈꿀 수 있는 완벽한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학교에서 갑작스런 검사에도 걸리지 말아야 했기에, 저는 이 테이프를 아침에 어머니가 정성스레 싸주신 도시락 가방에 숨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제게는 너무도 충격적이고 치욕적이었던 사건이라, 30년이 흐른 지금도 당시 도시락 가방의 모양과 브랜드까지 정확히 기억납니다. 옅은 푸른색의 프로스펙스 브랜드 도시락 가방이었죠. 밥통을 담는 아래 부분과 반찬통을 담는 위 부분이 나뉘어진 썩 실용적인 가방이었습니다.
저는 이른 아침 비디오 테이프를 받자마자, 가방 아래 부분 지퍼를 열고 어머니가 싸준 밥통 두 개를 빼서 윗칸에 반찬통들과 함께 담았습니다. 그리고 아랫칸에는 소중한 나의 비디오 테이프를 검정 비닐 봉지에 싸서 고이고이 숨겨 놓았죠.
문제는 제가 당시 너무 순진했던 것입니다. 얼마나 꽁꽁 완벽히 숨겼던지, 시간이 흐르면서 저 조차도 숨긴 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점심시간이 되어 도시락을 친구들과 둘러 앉아 나눠 먹고, 밖에 나가 신나게 뛰어놀았습니다. 수업시간에는 졸기도 하고 수업도 듣기도 하며 매우 일상적인 하루를 보냈죠.
저녁이 되어서도 남아 있는 도시락을 마저 해치우고 밤 10시가 넘어 늘 그렇듯이 피곤함에 쩔어 집으로 돌아갑니다. 당시 제 머릿속에는 그저 빨리 집에 가서 간식 먹고 씻고 자야겠다는 생각만 있었을 뿐 이른 아침 숨긴 비디오 테이프에 대한 생각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죠. 이런 멍청한 녀석 같으니.
문제의 사건은 이제부터 시작합니다.
밤늦게 집에 들어온 저는 매일 똑같은 루틴을 반복합니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거실에 계신 어머니께 힘없고 무성의한 "학교 다녀왔습니다"를 남기고, 부엌에 불을 켜고 들어가 다 먹은 도시락 가방을 싱크대에 던져 놓습니다. 가방이 분명 전보다 더 묵직했을 텐데, 안타깝게도 그땐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리고는 방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씻으러 욕실로 들어갑니다.
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있는 동안, 어머니는 늦게 공부하고 돌아온 아들 간식을 챙기러 부엌으로 걸음을 옮기십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싱크대 한곳에 평화롭게 놓여있는 도시락 가방을 어머니는 전혀 신경 쓰지지 않으셨을 테지요. 아들 먹일 과일을 깎으시고 접시에 준비해 나와 먹으라며 저를 부르십니다.
깨끗이 씻고 기분이 한껏 좋아진 저는 소파에 기대어 앉아 준비해 주신 간식을 먹습니다. 늘 그렇듯이 아주 행복한 시간이었죠. 그러나 그때는 몇 분 후 닥칠 일을 전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아들이 간식을 먹기 시작하면, 평소처럼 어머니는 아들의 냄새나는 도시락을 설겆이하기 시작합니다. 싱크대 물소리가 들리고 도시락 가방 지퍼를 여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그제서야 이 멍청한 녀석의 머리에 아침에 숨겼던 비디오 테이프가 덜컥 생각납니다. 아차, 큰일 났구나. 직감적으로 다급하게 엄마를 부르면서 급히 부엌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사단은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어머니는 비닐 봉지 속 비디오 테이프를 들고 "이게 도대체 뭐냐"며 할 말을 잃고 어이없이 서 계셨습니다. 에둘러서 친구들에게 빌려온 비디오 테이프라고 둘러댔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비디오 테이프 제목이 다름 아닌 '강시애마'였거든요. 당시 홍콩발 강시 영화가 유행하기도 했었고 그래서 친구들에게 빌려온 홍콩 영화다라고 무색하게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정말 애석하게도 이 비디오 테이프의 제목이 제 발목을 잡았습니다.
다른 게 아니라 '강시' 두 글자는 매우 어려운 한자로 '殭屍'로 표현되어 있었고, '애마'는 너무나도 노골적인 붉은색으로 한글로 선명하게 써 있었거든요. 어머니가 어려운 한자를 알아차리시는 못하셨을 거고, 분명 한글만 바로 읽혔을 것입니다.
그 당시 성인 영화로 최고봉을 찍던 애마부인 시리즈가 너무도 유명했던 시절이라, 한마디로 이건 외통수요, 꼼짝마라였습니다. 빠져나갈 곳이 전혀 없었습니다. 누가 봐도 그렇고 그런 성인 비디오였던 것이죠.
그때부터 "썩을놈", "정신나간놈", "미친놈", 세상의 이상한 놈은 모두 제게 다 갖다 퍼부시면서, 어머니는 등짝 스매싱을 몇 차례 날리셨고, 급기야는 아버지 오시면 다 말씀드려서 정신을 차리게 해야겠다고 겁을 주셨죠. 그때 부터 아버지 오실 때까지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를 정도로 저는 긴장해 있던 것 같습니다. 왠지 모르겠는데 같은 남자인 아버지에게 아마 더 쪽팔리고 창피했었나 봅니다.
갖가지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사실 나는 그렇게 막 보고 싶지도 않았는데, 괜히 가져와서 이게 무슨 꼴이람. 호기심에 잠깐 눈이 멀었다가 이제 와서 엄마 앞에서 강시도 아닌 애마를 들켜?'
'안 걸리고 가져왔다 해도 거실 한가운데 비디오가 있어서 언제 볼 수나 있었겠어? 밤늦게까지 부모님은 주무시지도 않는데, 아니, 그럼 새벽에? 어짜피 맘편히 보지도 못했을 텐데 괜히 빌려와서 이런 개망신이나 당하다니'
'아, 그냥 공부나 열심히 할 걸. 다른 데도 아니고 하필 엄마가 정성스레 싸주신 도시락 가방에. 이 얼마나 배은망덕한 행동인가. 아들놈이 효도는 못할망정.'
쪽팔림에 온갖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집에 오신 후, 저는 나가지도 못하고 방에서 긴장하고 있습니다. 공부하는 척을 했지만 귀는 밖에서 어머니가 죄다 일러바치는 소리에 초집중하고 있었죠.
"저 놈 자식이 학교에서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이상한 비디오 테이프나 빌려오고 그런다고요. 요즘 성적이 왜 떨어지나 했더니 저런 정신 나간 짓을 해서 그랬다니까요"
어머니는 한참을 아버지에게 쏟아내고 계십니다. 변명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어디 숨을 데도 없어 죽을 맛입니다.
'좀 있으면 아버지가 방으로 오실 텐데, 엄청 뭐라고 하시는 건 아닐까? 종아리 걷으라고 하면 어쩌지? 이 나이 먹고 맞게 생겼네...'
엄청 쫄아서 긴장하고 있을 찰나, 갑자기 문이 열리고 드디어 아버지가 방으로 들어오십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아버지들은 으레 아들이 이런 곤경에 빠지면 "니 나이 때 이런 거 궁금해 할 수 있어. 같은 남자니까 아빠는 이해해. 그래도 지금은 이런 거 볼 때는 아니지 않니."라고 하며 같은 아들 편을 들어주기도 하지만 제 아버지는 영화 속의 그런 아버지는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회초리를 맞거나 그러진 않았지만 엄마보다 더 심한 잔소리가 그때부터 시작됩니다.
"부모님이 너를 어떻게 키우는데 너는 이런 짓이나 하고 돌아다니고 정신 못 차리고 있냐"며 어르고 달래다 또 화가 나시면 "이놈의 자식이 벌써부터 이런 못된 것만 보느라고 공부는 뒷전이라 맨날 성적이 그 모양이지"하시며 욕을 한 바가지 하시기도 하고 거의 한 시간이 넘게 잔소리와 훈계를 들어야만 했습니다.
사실 아버지가 화가 나셔서 문제의 비디오 테이프를 집어 던지시거나, 회초리로 종아리 몇 대 맞을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그 정도까지 번지지는 않았고, 아버지도 이건 압수라며 비디오 테이프만 뺏어 가셨지 평소보다 조금 길었던 잔소리로 그날의 사건은 일단락이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그래도 이해를 하시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도 그때까지 단 한 번도 그런 쪽으로는 부모님께 걸려본 적 없던 제 명예에 나름 큰 스크래치가 났고 그런 모습을 보고 있던 누나나 여동생 보기에도 상당히 쪽팔린 사건이었습니다.
문제는 아버지에게 뺏긴 이 테이프 변상을 어떻게 하느냐였습니다. 아직까지 무사고로 돌려보던 테이프였기에 나름 걱정이 많이 됐습니다. 다음 날 학교에서 빌려준 친구를 만나 자초지종을 설명했지만 이 녀석이라도 별다른 대안은 없었죠. 무척 난감해 했고 저 역시 많이 미안했습니다.
며칠이 지나, 녀석이 어떻게 방법을 찾았는지 모르겠지만 저에게 2만 원을 내라고 합니다. 그 돈으로 같은 걸 구하려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저 역시 자세한 건 묻기도 싫었습니다. 당시 추락해버린 집에서의 이미지에 온갖 짜증이 나 있던 터라, 적지 않은 돈이었지만 모아둔 용돈을 털어 2만 원 주고 정리를 하게 됩니다.
이후에는 다른 테이프가 친구들 사이에 돌았던 걸 보면 녀석이 꿀꺽한 것처럼 보이지만 저는 신경 쓰지 않았고, 다시는 빌려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나 누이들과 재미삼아 지금 이 기억들을 얘길 해보면 그때 그들에겐 그렇게 충격은 아니었는지 기억을 가물가물하십니다. 그러나 저는 아이들에게도 얘기해줄 만큼 너무나 창피하고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던 그런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죠.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절대 안 하던 책가방 검사라도 할까 봐, 나름 숨긴다고 숨긴 나만의 비밀 공간이, 되려 어머니께 고스란히 "나 이런 거 봐요" 하는 꼴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냥 책가방에 넣고 왔더라면 아무 일 없이 재미나게 보고 또 반납하고 좋았을 텐데, 이 얼마나 웃기고도 슬픈 일입니까.
살면서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연일 내 뜻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도대체 왜 그러지 오늘? 머피의 법칙이야?"며 투덜대던 일도 많지만 제게는 철없던 고등학교 시절 이 이야기가 가장 원통하고 운이 없던, 그리고 창피함의 극치를 알려준 그런 사건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