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말 한마디로 천냥빚 갚는다

by 윤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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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가족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 요즘 아들녀석이 헬스장에서 푹 빠져 있는 웨이트 운동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막내는 흔히 헬스장 3대 운동이라고 하는 벤치프레스, 스쿼트, 데드리프트를 주로 한다고 하네요. 스쿼트는 저도 종종 하는 터여서 녀석이 얼마나 무거운 중량으로 운동하는지 호기심이 발동했죠.


"스쿼트는 고중량으로 할 때 62킬로 정도 하는 것 같아."


꽤 무겁게 하는 것 같은데도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하는 녀석의 말에 깜짝 놀라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데, 그 틈을 비집고 아내가 끼어듭니다.


"그러면 위급 상황 같은 때면 우리 아들이 엄마 업고 뛸 수도 있겠네~" 이어지는 녀석의 말이 걸작입니다.


"그보다 엄마한테 위급 상황이 생기면 안 되는 거지~"


무심한 듯 스윗한 녀석의 한마디에 아내의 입꼬리는 어느새 올라가고, 그 말이 정답이네 하며 환한 웃음을 터트립니다.


그 순간, 작년 구직 때의 일 몇 가지가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저는 주로 글로벌 기업 위주로 지원을 했었습니다. 구직 플랫폼에서 구인 공고를 보고, 적합한 포지션을 찾으면 지원서를 작성하고, 운 좋게 연락이 오면 면접을 이어가는 것이 당시의 일상이었죠. 저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여러 곳에 지원서를 냈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고, 감사하게도 한 곳에서 이메일이 왔습니다. 제 이력서에 관심이 있으니 온라인 인터뷰를 하자는 채용팀의 연락이었죠.


평소에 눈여겨봐 오던 회사이기도 했고, 요구되는 직무 역시 제가 그동안 해온 업무와 거의 비슷해서 저는 메일을 받고 뛸 듯이 기뻤습니다. 서둘러 일정을 잡아 회신을 했습니다.

인터뷰 전, 저는 보통 상대방이 어떤 분인지 미리 파악해 두는 편입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구직 플랫폼에서 먼저 정보를 찾아보곤 하죠. 만날 분이 거주지는 싱가포르인 것 같았지만, 연결된 지인들이나 졸업한 학교가 서울의 한 사립대인 걸로 보아 아무리 봐도 한국인 같았습니다. 속으로 무척 반가웠죠. 솔직히 말하면 여전히 영어 인터뷰는 제게 편하지만은 않았거든요. 일이 척척 맞게 돌아가는 것 같아 제 자신감도 한층 올라갔습니다.


인터뷰 당일, 화상회의 앱에 접속을 하니 누가 봐도 한국인으로 보이는 여성분이 저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저는 밝은 표정으로 "안녕하세요~" 하고 먼저 인사를 건넸습니다. 서로 인사가 끝나면 꺼낼 이야기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면서요.

하지만 제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Hello"로 시작한 그녀의 인사는 매우 빠르고 능숙한 네이티브 발음의 영어였습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저는 적잖이 당황했지만, 저도 다시 영어로 대답하며 인터뷰를 이어 갔었죠.

그렇게 한 10여 분이 흘렀을까요. 대화를 하다 말고 그녀가 갑자기 또박또박 정확한 한국어로 말했습니다.


"저희가 글로벌 회사다 보니 영어를 많이 쓰셔야 해서 제가 영어로 진행했습니다. 이제 확인했으니 지금부터는 한국말로 해도 될 것 같아요."


굉장히 불쾌했습니다. 그 여성분의 태도가 매우 무례하게 느껴졌고, 오랫동안 좋은 이미지로 여겨왔던 그 회사가 그때부터 180도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이후 이어졌던 대화도 건성으로 일관하게 되었고, 이따위 회사에는 연락이 와도 절대 가지 않겠다는 유치한 생각마저 들 정도였죠.


하지만 이와는 달리, 한마디 한마디가 제 마음을 움직였던 경험도 있었습니다.

한국의 한 회사에서 적당한 포지션이 있다며 연락이 온적이 있었습니다. 누구나 다 아는 대형 글로벌 기업이었고, 포지션도 평소에 제가 하고 싶던 역할과 비슷해 보여 흥미를 갖기에 충분했죠. 연락에 흔쾌히 수락하고 곧바로 다음 인터뷰 일정을 잡았습니다.

이어진 인터뷰는 하이어링 매니저, 즉 부사장님과의 인터뷰였습니다. 저보다 연배도 높고 경력도 더 많으신 분이셨죠. 인터뷰 질문도 만만치 않을 거라 생각해 단단히 준비를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당일에 처음 만나뵌 부사장님은 제 걱정과는 달리 너무도 편안하게 인터뷰를 이끌어 주셨습니다. 단 한 순간도 부담감이나 압박감 없이 전달하려 했던 모든 것을 충분히 말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셨고 능숙한 비즈니스 매너 역시 인터뷰 곳곳에서 느껴졌습니다.

재미난 것은 다름 아닌 영어 인터뷰였습니다. 무례함의 극치였던 앞선 경험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죄송하지만 저희가 영어 능력을 평가 항목에 두고 있어요. 괜찮으시면 지금부터 10분 정도 영어로 진행해도 될까요? 질문을 세 개 정도 드릴 텐데, 편하게 영어로 대답해 주시면 됩니다. 잘 이해가 안 되시면 다시 물어보셔도 돼요."

상대가 당황하지 않도록 먼저 양해를 구했던 그 한마디. 인터뷰는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물 흐르듯 자연스레 진행되었습니다.


저는 사실 마음속으로는 한국보다 싱가포르 포지션을 더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인터뷰가 끝나고 저도 모르게 아내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분이라면 서울에 가서 일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예상한대로 인터뷰는 잘 통과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후 과정에서 끝끝내 고배를 마시고 말았죠. 그렇지만 그 한번의 인터뷰는, 처음 만난 사람이었지만 그 사람의 인격과 나아가 그 성숙한 조직 문화까지 온전히 느낄 수 있었던 기억으로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말 한마디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관계를 바꾸고, 때로는 큰 문제를 풀어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와는 달리 신중하지 못한 말 한마디는, 의도와 상관없이 쌓아온 것 이상의 것을 한순간에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A single word can repay a debt of a thousand nyang" — this Korean proverb teaches that the right words, spoken at the right moment, can move hearts and resolve even the greatest difficulties. It also carries a quiet warning: careless words can undo everything built with care.

This essay begins with a son's offhand remark that melts his mother's heart at the breakfast table. It then turns to two contrasting job interview experiences in Singapore: one where an interviewer's thoughtless handling of a language test left a lasting chill, and another where a senior executive's gentle, considerate words made the author willing to cross borders for the role. Together, these moments remind us that how we speak reveals who we are — and that the warmest words often cost nothing at 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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