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부터 우리 몸을 보신해준 '약술'은?
설날하면 떡국과 기름진 차례 음식이 자연스럽게 떠올라 생각만으로도 배불러집니다. 그런데 혹시 설날에 마시면 나쁜 기운을 물리쳐 주고 가족들의 안녕과 건강을 빌어주는 술도 있다는 사실 아셨나요? 그 술은 바로 잡을 도(屠), 사악한 기운 소(蘇), 술 주(酒)라 하여 사악한 기운을 쫓는 술이라는 뜻의 '도소주'입니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들은 음력 첫날에 도소주를 마시며 액운을 쫓고, 좋은 길운은 불러일으키며 보신했다고 합니다. 오늘날처럼 다른 동물의 희생이 필수가 되는 보신이 아니라, 마시는 술만으로 기운을 보했다는 점이 참 새로운데요. 새로운 시작을 맞은 주방장도 양조장에서도 특별한 한 해를 도소주로 기념해보았습니다. 설날을 딱 일주일 앞두고 열린 <미리 설날 약주 시음회>에서 약이 되는 맑은술, 약주를 음식들과 함께 즐겼던 현장을 전합니다.
*도소주: 설날에 마시면 사기(邪氣)를 물리치고 장수한다는 도소를 넣은 약주. 소(蘇)는 사귀(邪鬼)의 이름이고, 도(屠)는 ‘죽이다’, ‘잡다’의 뜻이다. 따라서 도소주의 의미는 ‘사귀를 죽이는 술’이다. 즉, 사귀를 물리치는 약(藥)인 도소(屠蘇)가 들어 있는 술이라고 해서 도소주라 한다. 적출 7½전(錢), 계심 7½전, 방풍 1냥(兩), 도라지 5전7푼, 대황 5전7푼, 산초 5전7푼, 발계(菝葜) 5전7푼, 오두 2½전, 팥 14개를 삼각으로 만든 베주머니에 넣어서 섣달 그믐날 밤 우물 밑바닥에 걸어두었다가 설날에 꺼내어 술 속에 넣어서 달인 다음, 식구 모두는 동쪽으로 향하여 앉아 어린아이부터 시작하여 연장자의 순으로 마신다.
(출처:한국민속대백과사전)
#식전주
'주방장의 도소주(屠蘇酒)'
: 미리 설날 시음회는 도소주로 첫 시작을 열었습니다. 식전빵이나 샐러드가 아닌 '술'로서 시작한다는 점이 마치 서양의 '웰컴 드링크' 같죠? 주방장표 도소주는 육계피, 백출, 도라지, 길경, 대황, 인삼, 천초를 넣고 밤새 정성과 사랑으로 끓이고 달였습니다. 약재를 미리 물에 담가 놓아서 충분히 깨어나도록 했고, 직접 빚은 삼양주인 청주에 넣고 끓인 후 한 번 더 걸러내고 차게 식혔습니다. 이처럼 손이 많이 가는 술이지만, 그만큼 일 년의 안녕을 빌어주는 술이게 더 신경쓰게 되었습니다.
잠깐 도소주에 대한 tmi를 알려드리면 이 술은 맛이나 만드는 방식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각 집마다 다 달랐다고 해요. 가정에 구비되어 있는 약재와 재료들, 맑은 술, 그리고 한 해를 건강하게 나길 바라는 마음이 이 미지근한 술 안에 담겨있겠죠. 재밌는 점은 술을 끓이면서 알코올 성분이 거의 날아가기 때문에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든 가족 구성원이 마실 수 있게 되었어요. 대신 장유유서(長幼有序)에 따라 연장자부터가 아니라 어린아이부터 시작해 어르신까지, 차례로 술잔을 올리는 식으로 즐겼다고 합니다. 약재 향기 가득한 도소주로 기운부터 채우고 입맛을 돋워 보았으니 그다음 술잔을 채울 술과 음식은 바로!
#에피타이저 : 홍시 소스를 곁들인 문어죽순채
'상쾌한 솔향 가득 솔송주 & 강한 한 방이 있는 술샘19'
: 홍시 소스를 곁들인 문어죽순채는 한 입에 먹어야 조화로움을 맛 볼 수 있어요. 더불어 겹겹이 숨겨진 맛을 찾는 재미도 있죠. 새우 소보로를 문어와 죽순 아래에 깔아 신선한 식감과 풍미를 함께 느낄 수 있는 프레시한 애피타이저입니다. 곁들인 술은 솔송주와 술샘 19입니다. 솔송주는 2019년 청와대 설 명절 선물세트에 포함되었던 저명한 약주입니다. 독특한 유리병에 담긴 투명한 이 술은 13도이기에 부담스럽지 않고, 송순 농축액이 함유되어 있어 은은하게 풍겨오는 솔향이 매력적입니다. 개인적으로 솔송주는 가장 차갑게 냉장보관했다가 마시면 입안을 개운하게 씻어주고 소나무 향을 음미할 수 있어서 좋아합니다.
상쾌한 솔송주 다음에 이어진 술은 술샘 양조장의 새로운 리큐르, 술샘19입니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도수는 19도이며, 약주치고는 꽤 높은 편인데 맛과 향 역시 강력합니다. 강황과 생강이 함유되어 있어 은은할 것이라 생각하고 탁 털어 마셨다면 톡 쏘는 알코올과 강한 풍미에 놀랄 수 있어요. 한국 약주들이 너무 은은하고 약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에게 한 방이 있는 술샘19가 그 편견을 깰 수 있겠어요.
#메인 : '떡갈비와 참나물 샐러드, 연잎영양밥과 우렁된장라구'
'부드럽고 매끄러운 감자술 & 본질에 충실한 여여 & 전통이 노랗게 녹아든 아황주'
: 든든한 식사가 함께 해야 술도 더 맛있게 즐길 수 있겠죠? 메인은 배부르고 건강한 한 상으로 준비했습니다. 직접 고기를 다지고 치대서 만든 떡갈비 속에는 이름처럼 현미가래떡을 넣었습니다. 쫀득하고 촉촉하게 구운 떡갈비엔 상큼한 참나물 샐러드를 곁들였어요. 떡갈비와 함께 제공된 연잎영양밥에는 잡곡 찰밥과 견과류 등이 넉넉히 들어있고, 우렁된장라구로 간을 해 향긋하고 건강한 한 끼가 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메인이 든든한 고기와 밥이었으니 가벼운 술이 더 간절해집니다. 메인으로 준비한 술은 감자술, 여여, 아황주입니다. '감자술'은 13도로 감자 하면 딱 떠오르는 지역, 강원도 평창의 감자로 빚은 술입니다. 처음에는 은은한 감자 향이 다소 심심하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한 모금 한 모금 마시다 보면 버터리하면서 부드러운 느낌 때문에 다음 잔을 자연스럽게 부르게 됩니다. 감자로 만든 술하면 강한 보드카만 생각났는데, 한국에서는 실크처럼 부드럽고 감자 본연의 향을 담아낸 약주로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사실 놀랍지 않나요?
두 번째 술은 꽃잠 막걸리로 유명한 지리산 옛술도가의 '여여'입니다. 여여는 옛술도가 대표님으로부터 선물 받은 귀한 약주인데, 다른 분들과도 함께 나누고 싶어 고이 아껴두었던 술입니다. 보통 약주는 투명한 유리병에 담겨있는데 인데 반해 여여는 진한 녹색 병에 감추어져 있어 그 정체가 더욱 궁금해집니다. '모든 이치가 원래의 방향으로 어우러지는 맑은술'이라는 철학적인 의미가 담겨있는 여여는 여운이 길게 남아 정말 잘 빚은 약주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적당히 감도는 깔끔한 단맛과 곡물향 그리고 씁쓰름한 뒷맛까지. 간이 센 한국 음식들과 곁들이기에 딱 어울리는 술입니다. 꽃잠 막걸리도 애정 하지만 앞으로는 여여는 사랑하게 될 것 같네요.
마지막 든든한 식사를 정리해줄 술은 '아황주'입니다. 아황주는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양조 전통 방식을 파주의 최행숙전통도가에서 재현한 약주입니다. 농촌진흥청의 '우리술 복원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옛 문헌으로만 전해지던 술을 오늘날도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인데요. 까마귀의 검은색도 노란색으로 보이게 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 이 술. 약재가 따로 들어가 있지 않음에도 묘하게 코끝에 올라오는 약재 향과 쌉싸름함에서 단맛으로 여미는 것이 특징이죠. 아황주를 재밌게 즐길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숨을 참고 마셔보기예요. 17도라 알코올 향이 세게 느껴진다면 공기를 차단한 후에 코끝으로만 아황주 향을 음미해보세요. 아황주 본연의 향과 단맛만 느껴져서 몇 잔이고 마실 수 있답니다.
#디저트 : 크림치즈 곶감말이
'오미자의 다섯 가지 맛이 담긴 리큐르 술샘16 & 약주의 정수 미인약주'
: 탁주처럼 배가 부른 술이 아닌 가벼운 약주 시음회였기에 음식을 다른 시음회보다 포만감 있고 다양하게 페어링 해봤습니다. 든든했던 식사를 시원하고 달콤하게 마무리할 수 있도록 디저트는 '크림치즈 곶감말이'를 준비했어요. 달콤하고 쫄깃한 곶감이 부드럽고 고소한 크림치즈를 감싸서 맛의 조화가 재미있는 디저트입니다. 많이 달지 않기에 마지막엔 적당히 당도가 있는 리큐르와 약주를 페어링해 마무리했습니다.
애피타이저에서 즐긴 술샘19의 선배라고 할 수 있는 술, 술샘16은 오미자 리큐르입니다. 로제 와인처럼 붉고 맑은 빛깔이 매력적인 이 술은 오미자의 다섯 가지 맛(五味)이 완벽히 느껴지기보다, 단 맛에 좀 더 집중한 술이에요. 소주 도수와 비슷한 16도지만, 알코올 향은 전혀 강하게 느껴지지 않아 술이 약한 분들이나 여성분들이 특히 좋아하는 술 중 하나입니다. 양조장의 이름과 도수를 자신 있게 술 이름으로 내세운 술샘의 자신감이 엿보이는 술샘리큐르 시리즈는 자칫 올드하게 느껴질 수 있는 한국술에 젊은 생기를 더했다고 봅니다.
대망의 마지막을 장식할 술, 바로 미인약주입니다. 미인약주는 앞서 마신 아황주를 만드는 파주 최행숙전통도가의 또 다른 약주입니다. 미인 시리즈로 탁주와 약주가 같이 출시되는데, 미인약주는 17도를 자랑하며 특히 밸런스가 완벽히 잡힌 술입니다. 지나치게 달지 않고 파주산 멥쌀의 씁쓸함도 느낄 수 있으며, 누룩향이나 곡물향이 부담스럽거나 가볍지도 않아 약주의 처음 접하는 분에겐 자신 있게 미인약주를 추천할 수 있어요. 이 술을 가장 마지막 순서로 미룬 이유는 다양한 약주를 즐겨봤더라도 부재료 없이 약주 본연에 집중한 술을 기억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입니다. 약주의 정수, 미인약주는 기회가 된다면 꼭 접해보세요.
사실 주방장도 이렇게 다양한 약주를 한 자리에서 마셔 본 경험은 처음이었어요. 한국술이 정말 다양하다지만, 한 종류만 여러 상품으로 마셔보니 각각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었고 어떤 약주가 자신의 취향 인지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지난 탁주 시음회에서는 무궁무진한 세계의 넓이를 가늠해볼 수 있었다면 <미리 설날 약주 시음회>에서는 약주라는 술 본연에 집중하며 탐구해보고 싶어졌어요. 약이 된다고 하는 맑은술 '약주'의 매력을 든든한 음식으로 보신하며 흠뻑 즐겨 본 시간이었습니다.
▶ 다음 3월호에서는 달콤한 2월을 맞아 마셔 본 <한국 와인 시음회> 이야기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