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한 글쓰기와 술 빚기를 도와줬던 한국술
술을 마시며 글을 쓰는 게 꽤 낭만적이라고 오래전부터 생각해왔어요. 맨 정신에도 잘 써지지 않던 글들이 왠지 모르게 술을 마시면 더 어른스럽고 멋들어지게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죠. 실제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미국인 작가들 여섯 명 중 네 명꼴로 알코올 중독자라고 할 만큼* 작가들에게 술과 글쓰기는 필연적인 세트처럼 존재해왔던 것 같습니다.
“술은 기분을 돋워줘. 술을 마시면 감정이 고양되고 나는 그런 감정을 이야기로 담아내지. 하지만 이성과 감정의 균형을 맞추기는 힘들어져. 맨 정신으로 쓴 소설들은 시시해. 운세 얘기처럼 김이 빠져. 그건 감정 없이 이성으로만 쓴 글이라 그래.” - F. 스콧 피츠제럴드
“아시다시피, 글을 쓴다는 것은 스트레스가 굉장하니까요. 그리고 그 스트레스라는 게 어느 정도 나이까지는 견딜 만하지만 차츰차츰 술을 통해 약간은 신경적 의지를 삼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 테네시 윌리엄스
*출처: <작가와 술: 작가들의 이유 있는 음주>, 노컷뉴스, 2017.2.12
항상 동경해왔던 일명 "음주 글짓기"를 주주총회 모임에서 처음으로 시도해봤어요. 보통 술을 마실 때는 술만, 글을 쓸 때는 작성에만 신경 썼는데 약 한 시간 동안 글+술에 오롯이 집중했습니다. 음주 글짓기 결과는 어땠을까요? 위 작가들이 남긴 말처럼, 글이 생각보다 훨씬 솔직해집니다. 누그러진 긴장 탓인지 평소라면 심사숙고했을 단어 선택과 문장 구성이 과감해졌고, 추상적으로 뭉뚱그렸던 것들이 개인적인 감정까지 술술 이끌어낼 정도로 편안해졌고요. 소주처럼 으! 하는 센 술이 아닌 부들부들한 탁주를 마셔서 그런지 부드럽게 목을 타고 넘어가는 막걸리처럼 글도 술술 적혀 내려갔습니다.
생각해보면 보통 글을 ‘그냥’ 썼던 적이 없었습니다. 일기도 숙제 때문에 써야 했거나, 과제 때문에 혹은 대학교 주관식 서술 시험 때문에 글을 줄줄 써야 했죠. (월간 주방장도 어떻게 보면 독자분들과의 암묵적 약속이기에 매달 쓰게 되는 이유입니다.) 이처럼 그동안의 글쓰기는 누군가에게 확인받기 위해 써진 것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글짓기 교실을 다녔던 적 있는데, 방과 후 꼼짝없이 앉아서 먼저 읽어온 책 토론과 신문 NIE, 글짓기 대회 연습까지 ‘억지로’ 글을 썼던 경험으로 남아있어요. 말로 하면 되는걸 굳이 문자를 사용해 완벽한 문장으로 적어야 한다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었어요. 사실 글쓰기는 어렸을 때도 힘들었지만, 성인이 된 지금도 편하게 시도할 수 있지만, 결코 쉽지만은 않은 장르가 되었고요.
이번 주주총회에서도 안건이 ‘술과 글’이었기에 글을 쓰긴 했지만, 성인이 되어서 어떠한 이유 없이 펜과 키보드를 잡은 건 정말 오래간만이었습니다. 주제는 글 선생님을 맡아주신 기자 멤버분께서 정해주셨습니다. <일의 기쁨과 슬픔> 성인이 되면 필연적으로 해야 하는 일, 우리는 각자의 일을 어떻게 마주하고 있을까 술과 함께 적어봤습니다. 집중을 위해 서로 사회적 거리를 두고 누군가는 펜을 잡고, 누군가는 키보드를 두들겼습니다. 처음으로 주주총회를 하면서 맞이한 침묵이었고, 마치 대학 시험장에 온 것 같은 초집중하는 분위기와 꼴깍꼴깍 넘어가는 술이 공간을 채웠습니다.
실제 아홉수인 멤버는 자신의 아홉수 인생에 대해 고백하기도 했고, 기상 분야에서 근무하시는 멤버분은 ‘뜬구름 잡기’라는 재치 넘치는 글을 쓰셨어요. 이전에 몸담았던 일터의 하루를 나열하신 멤버 분도 있었고, 직업이라는 것에 우리가 어떤 자세로 맞이하고 있는지 꼼꼼한 고찰을 한 글도, 일과 일 사이에 생긴 틈을 자기 고백적으로 남긴 글, 자영업에 종사자로서 느끼는 기쁨과 슬픔에 대해 정리한 글까지. 주제는 ‘일의 기쁨과 슬픔’이었지만 각자가 느낀 기쁨과 슬픔들이 글에 고스란히 녹아들었습니다. 약간의 알코올 섭취가 이렇게 고백적인 글을 쓰게 만들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죠.
그래서 [월간 주방장 6월호]에서는 주주총회에서 차분하게 글을 쓰는데 연료가 되어준 한국술과 석탄주를 빚으며 함께 한 술들을 소개합니다. 이번 회차의 술을 선정하는데 가장 중점에 두었던 것은 ‘의미’입니다. 그냥 맛있어서 마시는 술보다 사소하더라도 확고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한 병에 담긴 술의 맛과 의미를 잘 품은 이름의 한국 술들을 하나씩 눈으로 마셔보세요.
보통 술이름이라 하면 두음절 혹은 세음절인게 대부분인데 '만강에 비친 달'이라니. 시적이면서 궁금증을 자아내는 이 술은 단호박이 들어간 탁주입니다. 만개의 강에 달이 비친다는 의미의 이 막걸리는 강원도 홍천 예술 주조의 작품으로, 사랑과 자비가 온 누리의 사람들에게 펼쳐진다는 개념을 술 이름에 담았다고 합니다. 홍천쌀과 직접 띄운 누룩 그리고 홍천 특산물 미니 단호박이 합쳐져 노오란 달빛 같은 탁주로 완성되었습니다. 단호박이 함유되어 있어 빛깔은 다른 탁주보다 노란 빛을 띠고 입촉감 역시 빈틈없는 바디감을 선사합니다. 심하게 꾸덕하진 않지만, 한없이 가볍지 않은 묵직한 질감이랄까요. 처음엔 약간은 새콤하며 콤콤한 누룩향이 느껴지고, 끝에는 단 맛과 고소함으로 마무리됩니다. 도수는 10% 이지만 알코올취는 잘 느껴지지 않고 매력적인 산미 덕분에 입 안은 금세 침으로 고이고 다음음 잔을 마시고 싶게 여운을 끊임없이 남기는 술입니다.
'병 속의 향기는 방에 가득하고 술잔의 빛은 문창에 비친다. 좋은 이름을 붙이고 싶을 뿐 술의 양은 묻고 싶지 않네' -동파-
술에 이렇게 멋진 문구가 적혀 있는 술, 동정춘(洞庭春)은 독자적인 술 이름이 아니라 옛 문헌에서 명주로 불린 술입니다. 그래서 동정춘은 양조장별로 여러 가지 버전이 존재해요. 이 날 마신 동정춘은 강원도 홍천 산자락에 위치한 '산수 양조장'의 동정춘이었는데, 이 외에도 술 빚는 전가네, 국순당 등 여러 양조장에서 동정춘을 만들고 있습니다. 동정춘은 양조인들 사이에서는 '빚기 힘든 술' 중에 하나인데 밑술은 익반죽한 구멍떡, 덧술은 찹쌀으로만 해서 이양주 기법으로 빚은 술입니다. 대신 사용되는 쌀에 비해서 들어가는 물이 굉장히 적어서 얻어내는 술의 양이 적고, 약간의 물과 쌀이 가진 수분을 모두 술로 짜내기 때문에 감칠맛과 묵직하고 촘촘한 입촉감이 가히 매력적입니다. 이 날 마신 산수 양조장의 동정춘은 부드러우면서 달달한 바닐라향이 퍼졌고, 한 멤버는 동정춘 맛은 마치 녹은 바밤바 아이스크림 같다고도 하셨어요. 물보다 쌀의 함량이 높은 탁주다 보니 확실히 단맛이 강했지만 고소함과 질감이 뒷받침해주어 크게 거슬리진 않는 편입니다.
두견주는 작년 월간주방장 6월호에서 한 번 소개한 적이 있어요. 남북한을 걸쳐 한반도의 봄에 가장 빨리 그리고 많이 피는 꽃, 진달래(두견화)는 봄을 가장 먼저 알리는 꽃입니다. 충남 당진 면천면에서 빚는 이 술은 진한 노란색을 띱니다. 평화의 의미를 담고 있어서인지 작년 남북정상회담 만찬주로 남북의 정상들이 마시기도 했으며, 동그란 호리병에 담겨 있어 확실한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도수는 웬만한 소주만큼 높은 18%이며 한 잔을 마시면 달콤함으로 그리고 향긋함으로 마지막엔 끈적한 달콤함으로 퍼집니다. 도수나 달콤함은 포트와인 같기도 하고, 아로마와 입촉감은 진한 미드(Mead, 꿀술) 같기도 하고요. 두견주는 맛이 강한 안주들보다는 오히려 와인 플래터같이 크래커나 치즈, 과일 등 가벼운 안주들과 페어링 하기 좋아요. 쌀과 누룩, 진달래꽃만으로도 과실주만큼 향긋하고 달콤한 술이 만들어질 수 있다니, 우리의 한국술도 충분히 와인의 다양함에 버금갈 수 있다는 걸 다시금 확인합니다.
제일 귀여운 한국술 이름을 꼽자면 저는 두루 전통양조의 '술 헤는 밤'이 바로 떠오릅니다.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처럼 술 한 잔에 부드러움, 술 한 잔에 고소함, 술 한 잔에 달콤함을 상상하게 하죠. 예술주조와 산수양조장처럼 두루전통주조 역시 강원도 홍천에 위치해 있으며(역시 물 좋은 지역엔 양조장이 많이 들어서 있어요.) 직접 만든 누룩을 사용해 <술 헤는 밤> 같은 탁주 외에도 <삼선>, 재배한 메밀로 내린 증류소주 <메밀로>까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본연에 충실한 한국술을 만들어냅니다. 술 헤는 밤을 설명할 때 항상 빼놓지 않는 것은 정말 부드러운 '질감'입니다. 실크같이 보들보들하고 몽실몽실한 질감이 여느 탁주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부드러움을 선사하고, 어떻게 넘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깔끔한 목 넘김이 특징입니다. 그렇다고 가볍지는 않고 도수도 8도이며, 오히려 드라이한 편에 속해서 처음 막걸리를 드시는 분이나, 여러 탁주를 마실 때 가장 처음 마시기에 좋은 술이기도 합니다.
지난 주주총회 1회에 마셨던 충청도 술 ,백련 Misty와 비교하면 양도 늘어났고 살균처리를 하지 않은 생막걸리를 선택했습니다. 편의상 큰 백련misty, 작은 백련misty로 구분하자면 작은 백련은 살균처리를 해서 훨씬 부드러운 맛과 드라이하고 깔끔한 편이었고, 큰 백련은 살아있는 술임을 확실히 보여주듯이 탄산도 톡톡 올라오고 조금 더 단맛이 도드라졌어요. 큰 백련은 확실히 은은하게 달지만 약간의 알코올취(도수는 7%)와 누룩향도 느낄 수 있어서 남녀노소 생각하는 막걸리의 정석 같고, 같은 라벨이지만 병 모양은 달라서 크고 목이 긴 병이 생막걸리임을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충남 당진 신평양조장에서는 백련이 크게 세 가지로 출시되는데 불투명 플라스틱 병에 담긴 스노우Snow와 Misty(생탁주/살균탁주)로 같은 술을 다른 버전으로 즐기는 재미가 있어요. 또한 백련 약주도 출시되고 있어서 쌀로 만들지만 연잎으로 하나 된 탁주, 약주를 맛볼 수도 있고요. 참고로 이 날 석탄주를 빚고 바로 부친 뜨근한 김치전과 백련을 함께 곁들였더니 최고의 마리아주를 찾은 듯 했습니다.
어떤 작업을 할 때 '연료'가 될 '마실거리'는 참 중요해요. 연료에 따라서 연비가 달라지고 결과도 달라지기 때문이죠. 벼락치기 시험공부를 할 때 커피나 에너지 음료가 되었든, 운동할 때 마시는 단백질 셰이크가 되었든 효율성을 높여주는 음료 선택은 신중해야 합니다. 이번 주주총회 멤버들과 함께하는 글쓰기와 술빚기를 통해 우리 한국술이 꽤 괜찮은 연료임을 확인했어요. 물론 알코올 중독처럼 술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상태를 원하는 건 아니지만 너무 긴장되고 걱정이 많아 어떤 것도 손에 잡히질 않을 때, 한 잔의 술이 스무스하게 일을 처리하게 도와줄 수 있기 때문이죠. 덧붙이자면 어떤 고백적인 글을 쓸 일이 생긴다면 한 잔의 막걸리, 강력히 추천합니다. 그럼 다음 [월간주방장]으로 찾아올게요! 아마도 술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