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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람 Dec 15. 2023

3. 삶의 가장 밑바닥에서 1

사업을 시작하다.

저는 남들보다 이른 결혼을 하였습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결혼을 했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많이 어린 나이였습니다. 예쁜 가정을 이루고 싶은 마음도 컸지만, 가난했던 우리 집에서 독립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우리 부모님은 교회를 개척하신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라,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고, 난방이 거의 되지 않는 상가 교회에서 저희 가족들이 살았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나만의 집, 나의 가정을 이루고 살고 싶었습니다. 부모님께도 저의 잘 사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기도 했구요.


대학교 3학년 때부터 교회에서 만나 교재 하던 남자 친구는  안정된 직장을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의 집에선 타지에서 혼자 자취하며 살아가고 있는 아들이 안쓰러웠는지, 하루라도 빨리 저와의 결혼을 서두르려고 했습니다. 시아버지, 시어머니의 예쁨을 받으며, 저는 대학생활을 했고, 예비 시댁에선 제 등록금을 내주시기도 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결혼을 하며 저는 그렇게도 원하던 제 집을 얻게 되었습니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살 수 있는 집이 있어 참 좋았습니다.


결혼을 하고 첫 아이를 낳고 얼마 안 되어 우리나라에 IMF가 불어 닥쳤습니다. 그땐 참 많은 가장들이 직장을 잃거나, 사업이 무너져 폐업을 하기도 했지요. 든든한 직장을 다니고 있다는 것에 안도하고 있던 신랑도 IMF로 인해 구조조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얼마 후 준비되지 않은 퇴직을 하게 되었고, 갑자기 퇴직한 신랑은 가족을 위해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대기업에 있다가 퇴직했어도,  IMF로 인한 퇴직자가 넘쳐 났으므로 취업하는 것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어려웠습니다. 회사들도 경영이 어려워 인력을 더 이상 증원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영업사원부터 가족끼리 경영하는 회사 등 영세 업체 등에서 닥치는 대로 일하며 1년을 보냈습니다. 들어오는 수입은 거의 없거나 일정치 않았고, 1년 동안 남편의 퇴직금을 야금야금 쓰며 살았습니다.

퇴직금도 거의 바닥이 나고, 마이너스 통장까지 만들어 사용할 무렵, 돈을 제대로 벌 수 있는 직장을 찾기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남편은 일을 하면서도 틈틈이 여기저기 기업에 이력서를 넣고 있었습니다. 이전에 근무했던 기업이 빅쓰리 안에 드는 큰 회사였기에, 금방 취업이 될 거라 생각했지만, 아예 신입사원을 모집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 취업이 어려웠습니다. 또한 남편은 나이가 34세로 , 신입 사원으로도, 경력사원으로도 애매 한 나이였습니다. 그 당시엔 취업 제한 나이가 있었는데, 대부분의 기업에선 신입사원으로 35세 미만의 신입을 원하였습니다. 거의 커트라인에 가까운 나이였기에  매번 면접까지 다녀왔지만, 취업이 안 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나이가 문제인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재 취업이 어려워 마이너스 통장으로 살아가려니 이건 아니다 싶었습니다. 취업이 어려우면, 창업이라도 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즈음, 아이와 함께 교육방송인 EB*방송을 보다가 인터넷 학습 콘텐츠와 학습지를 같이 운영하는 OO지역 지사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았습니다. 우리는 아이들 교육에도 관심이 많았기에 이런 일이라면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교육분야에선 유명한 EB* 방송사에서 하는 일이라면, 망할 일은 없어 보였기에 '있는 돈 없는 돈'을 모두 끌어 모아 사업을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우리가 살던 새 아파트를 처분하고 다세대 주택 전세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그 돈으로 사업 밑천을 마련하여 사무실을 얻고, 직원들을 모집하여 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사업 첫 달부터 6개월까지만 고생하면 회원도 늘고, 두 사람 인건비도 꼬박꼬박 들어올 거라 믿었습니다.

영업도 정말 열심히 했고, 많은 돈을 들여 이벤트도 진행하며 회원들은 순조롭게 모집이 되었습니다. 상담문의가 오면 찾아가 성심성의껏 상담해 주었고, 온 정성을 다해 4개월 만에 회원 수로만 보면, 일정한 이익이 나와야 했습니다. 인터넷 컨텐츠 사업이라, 사이트에서 결재를 하고, 모든 이용 대금이 본사로 들어간 뒤, 각 지사로 대금이 내려 오는 구조 였습니다. 

회원들은 순조롭게 모집이 되었지만, 어쩐 일인지 본사는 우리 지사에 보내 주어야 할 대금을 차일피일 미루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조금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습니다.  


'전국의 지사들이 다 모집이 되고, 각 지사들로부터 받은 프랜차이즈 가맹비도 상당하고, 우리가 회원모집도 원활하게 하고 있는데 왜 대금을 주지 않을까.'


사업을 시작한 지 8개월 이 다 되어도 입금되는 금액이 말도 안 되게 저조하거나, 주지 않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직원들에게 월급을 주지 못하는 달도 많았습니다. 본사는 핑계만 대었고, 여전히 돈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사업이 잘 되지 않고, 빚이 늘어가자 우리 부부는 싸우는 횟수가 늘어났습니다. 서로에게 날카로운 말로 상처를 주었고, 상대방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현재의 상황이 암울했고, 희망이 없었기에 크게 싸우고 다 포기하고 싶을 때도 정말 많았습니다.


알고 보니, 다른 지사들도 거의 대금을 정산받지 못하고 있었고, 본사 또한 기술팀들이 다 이직하여서 새로운 인터넷 교육 콘텐츠를 만들어 내지도 못하는 실정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가 하는 교육컨텐츠 사업이 EB*방송국에서 운영하는 직영 회사가 아니라,  EB* 방송국의 이름을 빌리는 대가로 매월 15%의 로열티를 지불하고 있었던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K방송국 PD출신의 회사 대표와 유명 프랜차이즈만 믿고 시작했던 사업이었는데, 이 모든 것이 다 허울 뿐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른 지역의 지사장님들과 함께 본사에 몇번이나 찾아가 항의를 했지만, 본사도 이미 이사진들과 대표가 잠적하여 망한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였지만, 본사의 몰락으로 지사들 역시 철저하게 망하여 길거리에 나 앉게 되었습니다. 


 첫째 아이가 4살이 되었지만, 매일 거의 라면으로 끼니를 때웠던 기억이 납니다. 밀가루 알레르기가 있던 아이는 늘 비염과 알러지성 결막염을 달고 살았습니다. 과일을 좋아했던 아이가 하루는 포도를 먹고 싶다고 하는데, 포도 한 송이조차 살 수 없는 나 자신이 너무 무력하고 원망스러워 많이 울었습니다.  

마음이 찢어지게 아팠지만, 시댁에나 친정에는 우리가 하던 사업이  망했다는 사실을 창피해서 말하지 못했습니다.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남편과는 경제적인 문제로, 사업이 망한 책임을 두고 매일 다투고 싸웠습니다. 매일이 지옥 같았고, 죽을 것만큼 힘들었습니다. 이 사람과 이렇게 미워하고 싸우느니 차라리 이혼하여 끝내는게 아이를 위해서도 낫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다음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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