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어리 Aug 14. 2024

어, 이게 되네?

완벽주의자의 호주 워홀; episode 4


이전 편에서 이어집니다.





호텔 리셉션을 지나 레스토랑 프론트에 서 있는 직원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안녕! 혹시 너희 매니저랑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그 직원은 그의 바로 옆, 딱딱하게 양복을 차려입고 나를 내려다 보는 엄격한 인상의 남성을 가리켰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내 레주메를 받아들더니, ‘그냥 지금 인터뷰 볼까?’ 하고 제안한다. 나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물론이지!’ 했지만 뒤돌아 망연자실했다. 간단하게 이력서만 돌릴 줄 알고 면접 준비를 하나도 안 했고, 면접 보는 곳은… 5성급 호텔 레스토랑이다!

(면접 일정이 잡히면 그때 '제대로' 준비하려고 했다...)


그는 꼼꼼하게 내 레주메를 한 줄 씩 읽어보더니 내 한국 경력 사항들에 대한 질문을 했다.

'여기선 어떤 일을 했어?',

'이 카페는 어떤 곳이었는데?'


그 순간, 내 영어의 문법이 어떻고 단어 선택이 어떤지 생각할 겨를이 없다.

기세다. 기세 뿐이다.

나는 없는 자신감까지 멱살 잡고 끌어올려 차분히 설명했다.


매니저의 표정이 묘했다. 잠깐 생각하는듯 하더니 내게 레퍼런스가 있냐고 물었다. 그러니까, 내 경력을 증명할 수 있는 전 직장 동료나 매니저의 연락처가 있냐는 말이다.

당연히 없다. 호주는 이력서에 전 직장 상사나 동료의 연락처를 레퍼런스로 적는 것이 보편적인 일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굳이 한국 직장까지 물어볼 줄은 몰랐다. 와, 나 워홀 제대로 준비한 거 맞아?

나는 머뭇거리다 당장 생각나는 사람의 연락처를 줬고, 그렇게 내 첫 인터뷰는 마무리 되었다.


근거는 없지만 왠지 느낌이 좋았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걱정이 몰려왔다.

내가 저렇게 큰 호텔에서 일을 잘 해낼 수 있을까? 아냐, 벌써부터 김칫국은. 설마 되겠어?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다 결국 레주메나 더 돌리자는 결론에 이르러서야 멈춘다.


인터뷰를 본 다음날, 구직 압박감이 심해졌다.

어려운 처음을 해냈다는 어제의 성취감은 그때 뿐이고, 오늘도 어김없이 똑같은 짓을 또 반복해야된다는 생각에 무기력해졌다. 본격적으로 구직을 시작한 건 딱 하루 뿐이었지만 호주에 처음 도착해서 지역이동을 하기까지는 2주란 시간이 걸렸고, 어떻게든 적응하고 나아가려 기를 쓰느라 벌써부터 기진맥진했다. 워킹 홀리데이를 왔는데, 워킹도 아니고 홀리데이도 아닌 이 애매함에 무기력해졌다.


그렇게 방에 처박혀 있는데, 내 윗 침대를 쓰는 룸메 W가 들어와 인사한다. W는 스쿠버 다이빙 강사 일을 구하는 중이었고, 마침 인터뷰를 다녀온 후였다. 1차 인터뷰는 합격했고, 수영 테스트를 위한 연습을 해야한다며 같이 라군에 수영 하러 가자고 한다.

우울하게 처박혀있느니 홀리데이 온 기분이라도 내자 싶어 흔쾌히 따라 나선다.


케언즈는 하루면 시내 지리를 외울만큼 작은 지역이지만 각종 호텔과 레스토랑, 공공 수영 시설이 있는 주변 산책로에만 가면 휴양지 분위기가 물씬 난다. W가 자유형을 연습하는 동안 나는 유유자적 물에 몸을 맡겼다.




구직에 대한 압박감은 여전했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건 아니었다. 나는 모두가 지루하다고 말하는 이 작은 도시가 첫눈에 좋았고, 되는 데까지 최대한 오래 눌러붙어있고 싶었다.

그래, 힘들면 이렇게 놀고 힘나면 다시 레주메 돌리면 되지. 아무렴 어떤가, 생각했다.


저녁 어스름 노을이 지고 주변이 선선해질 때 쯤 W과 나는 물 밖으로 나왔다. 잠시 화장실에 간 W를 기다리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울린다. ‘어디서 온 건가’에 대한 추측을 해보기도 전에 전화 영어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리는 엄지 손가락을 [통화] 버튼에 댄다.


경쾌한 목소리가 내게 안부를 묻는다. 어제 인터뷰 봤던 그 호텔이랜다. 그 다음은 뭐라는 건지 너무 빨리 말해서 알아 들을 수가 없다. 어쨌든 디테일한 건 이메일로 보내준다고 한다.

정확히 알아들었던 건, 'Inductioin', 'Next Tuesday', 그리고 ‘Congratulations!’

영문도 모른 채 ‘Thank you!’를 외친 뒤 전화를 끊고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 된다.


나… 합격한 것 같은데?


내 명치를 꽉 누르던 무언가가 폭죽이 되어 내 머리 위로 팡팡 불꽃을 터뜨리는 것 같다.

어안이 벙벙하다. 이게 이렇게 빨리 될 일이라고? 이게 된다고?

화장실에서 나온 W를 붙잡고 방방 뛰었다. 주변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일 수가 없다.




운이다, 운이 아니고선 설명이 안 된다.

어쩌다 친구들에게 내가 이 곳에 와서 하루만에 일을 구했다고 하면 모두가 '대체 어떻게 했냐'고 묻고, '너 진짜 운 좋다!'고 입 모아 말했다 (심지어 나를 뽑은 매니저도 그렇게 말했다). 그때의 케언즈는 성수기임에도 구직난이 심해져 대부분의 이들은 꼬박 한달이 걸렸다 했고, 많은 이들이 포기하고 지역 이동을 하던 시기였다.

맞다. 나 진짜 운이 좋았다. 나는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까지도 감사한 마음 뿐이다.


그 결과는 ‘운’이었겠지만 애초에 생각없이 그냥 움직였기에 그런 운도 작용할 수 있었다.

나는 돌다리도 백 번 넘게 두들겨보고도 갈까 말까 고민하며 준비가 될 때까지, 완벽하다고 느낄 때까지 절대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한 적이 빈번했다. 실패할 모든 가능성과 그로 인해 괴로울 상황을 그려보다 결국 그 안에 내가 갇히는 것이다. 그럴 땐 내 등을 한 번 떠 밀어줄 사람이 있거나 피치못할 상황이 주어져야만 겨우 한 발짝을 내딛을 수 있는데, 워홀의 특수한 상황(돈을 벌어야 살아남음)이 내 등을 떠민 셈이다.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있을 때, 때로 머리보다 몸이 먼저 행해야할 때마다 나는 자동으로 이 때를 떠올린다.

'어? 이게 되네?'

되면 좋고, 망하면 그때 가서 생각하기. 망한 뒤의 내가 어련히 알아서 수습하지 않겠어?


내가 평소 좌우명처럼 외는 한 문장이 있다.

"When nothing goes right, go left."

계획한 대로 되지 않아도, 괜찮다.

예상한 길로 가지 않고 멀리 돌아가더라도, 결국 내가 바라던 목적지에 가 있을 거라는 믿음만 있으면 된다.







이전 04화 그래서 그 계획은 망했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