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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어리 Aug 07. 2024

그래서 그 계획은 망했고,

완벽주의자의 호주 워홀; episode 3



'워홀'하면 공식같은 3가지 목표가 있다.

돈, 경험, 영어.


출국 전, 흔들림 없이 원하는 것을 모두 얻어오겠다며 쓴 내 일기장 속엔 이 세 목표를 녹여 세분화한 목록들이 빼곡히 적혀있다. 세 가지 중 하나만 집중해도 모자르다고들 했지만, 나는 적당히 모두 다 성취하고 싶은 오기가 있었다.


하지만 호주에서의 1년을 보내던 중에 깨달은 것은,

거창하게 세웠던 목표들이 사실은 내가 진정으로 원한 건 아니었으며,

내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곳에 던져졌지만 오히려 더 만족스러웠던 의외성을 경험하기도 했다.


돈에만 집중하며 주 40시간 이상을 일했던 날들 뒤에는 얽매이지 않는 자유가 고팠으며, 새로운 사람과 장소를 탐닉하며 떠돌아다닌 날들 끝에는 정해진 일상의 안정감이 필요해졌다.

(영어는 이러나 저러나 언제나 필요했고)


그래서 워홀의 중반 쯤부터는 워홀 ‘3대 목표’들을 적당히 녹여 돌아가며 추구했다. 그렇게 내가 세운 목표에 잡아먹히지 않고 균형을 잡기 위해 고군분투한 끝에, 객관적인 수치로써 보이는 목표에는 못 미치지만 내적으론 적당히 만족하는 성취는 이룬듯 하다.

한편 이런 표면적인 목표 외에 내면적으로는 얻은게 무엇일꼬, 생각해보니 하나 있다. 바로 이거다.


‘어? 이게 되네?’


나조차도 될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일어나버린 일, 운이 아니고는 설명이 안되는 일.

모든게 철저하게 준비 되어야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완벽주의자인 내가, 준비가 됐든 안 됐든 일단 질러놓고 생각하는게 먹힐 때도 있다는 걸 몸으로 깨달아버린 그 때. 그 때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그 시작은 계획에 없던 지역 이동을 하면서 부터였다. 기껏 한국에서 세운 계획은 모두 어그러지고, 그러한 옵션이 있다는 것은 인지하고 있었으나 애초에 관심조차 없던 ‘그’ 선택지로 향한다는 것은 계획주의자인 내게 있어 흔치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길이 안 보이는 현실에 머무르는 것보다 정신 나간 척 질러보는 게 그 상황을 타계하는 유일한 해결책 같아 보였다.


그 날로부터 호스텔과 근처 도서관을 오가며 레주메를 쓰고, 내가 갈 도시의 구직 현황은 어떤지, 집 매물은 어떤지 알아보기 시작했다. 언제나 일이 넘치는 대도시가 아닌 소도시에서의 정착은 쉽지 않아보였지만 곧 성수기가 오면 구인을 많이 할거라는, 사실은 없고 소문만 무성한 이야기에 내 희망(이라 쓰고 돈, 시간, 에너지라 하는 전부)를 걸어보기로 했다.



내가 이동한 도시는 퀸즐랜드 북부에 위치한 휴양 도시, 케언즈. 호주의 한겨울에도 20도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 기후와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라는 유명한 스쿠버 다이빙 스팟 덕에 호주 사람들이 겨울 휴양지로 많이 찾는 곳이며, 전세계 워홀러들이 세컨 비자를 따기 위해 몰려드는 곳이다.

그렇게 나는 좁아 터진 케언즈에 우글거리는 워홀러 중 하나가 되었다.




도착한 다음 날, 레주메 60장을 L자 파일에 고이 넣고 호스텔을 나선다. 목표는 10곳, 본격적으로 발로 뛰어 일을 구하는 지극히 워홀러적인 행위를 시작해본다.


레주메를 돌리는 일은 말처럼 가볍거나 간단하지 않았다. 그 첫 발을 떼는 게 무슨 자석으로 딱 달라붙은 것처럼 무겁고, 머릿속엔 어떤 말로 시작할지, 어떤 표정을 지을지, 만약 영어를 절면 어떡할지 머리가 팽팽 돈다. 그 끝에 마침내 들어가려다가 코 앞에서 다시 돌아서고, 주변을 맴맴 맴돌다 다시 입구로 갈라치면 또 다시 발이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는… 내 몸이 내 맘처럼 안 되는 미칠 것 같은 긴장감과의 싸움은 치열했다.


그 짓을 거의 20분 정도 하고서 미친 척 직원에게 돌진한다.


“Hi, how's it going?!”


세상의 모든 긍정적인 에너지는 내가 다 빨아먹는 스펀지다-라는 얼굴로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인사한 뒤 레주메를 건넨다. 다행히도 직원이 상냥하게 받아준다. 하이어링하고 있진 않다고 했지만, 그럼에도 그 어려운 처음을 해냈다는 뿌듯함에 아드레날린이 폭발했다. 그 뒤로 용기를 얻어 20분 망설이던 걸 16분, 13분, …5분. 주저함이 줄어든다.


하지만 30도를 웃도는 날씨에 목표의 절반도 못하고 녹초가 되어 호스텔 셔틀버스 정류장으로 돌아가는 지도를 켰다. 가는 경로를 보니, 마침 이력서 내려고 미리 저장해두었던 레스토랑이 근처다.

근데… 뭔가 이상하다. 레스토랑 자리에 호텔이 있다. 그것도 외관부터 으리으리한 5성급.


’와… 여긴 이력서 내도 안 뽑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마저 가던 길을 가려던 순간,

’딱! 여기 한 장만 돌리고 끝내자!‘ 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어려운 첫 관문을 뛰어넘었다는 아드레날린이 아직 남았는지 더위에 지쳐 정신이 나갔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뭐 어때 그냥 레주메만 주고 나오면 되는데!

가려던 발을 돌려 묵직한 호텔 문을 밀고 들어간다.





2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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