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주의자의 호주 워홀; ep 2
‘호주 워홀‘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질문 중 하나는 '워홀 가면 영어 느나요?'일 것이다.
글쎄, 이건’사바사‘다.
영어 한마디도 잘 못 하던 사람이 적극적으로 외국인 친구도 사귀고, 꾸준히 공부해서 극적으로 성장한 케이스도 있고, 반면에 워홀러는 아니지만 10년을 호주에 살면서도 초-중급 수준의 영어를 구사하는 케이스도 봤다. 그러니 영어는 자기 하기 나름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 워홀 시작 전까지 공부를 게을리하는 것을 권장하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영어 공부를 할 수 있는 것보다 두 배는 더 열심히 하고 가야 된다‘고 주장하는 편이다. (특히 손님과의 교류가 많은 호스피탈리티 잡을 할거라면 더더욱)
만약 누군가 '워홀 가는데 영어 못해도 되나요?' 라고 묻는다면, 너무 당연하게도 '아니요'라고 답할 것이며, 출국 직전까지도 전혀 답이 안 나오겠다면 적어도 영어못해서 서러울 마음의 결심 정도는 하고 가시라 하겠다.
호주에서 1년 동안 지내며 가장 할 말이 많은 주제가 영어다. 대체로 쪽팔리고, 열등감 느끼고, 서러웠던 기억들이다.
학창 시절부터 가장 좋아하던 과목이 영어였고, 잘하고 싶은 욕심도 커서 꾸준히 독학해 왔다. 호주에 오기 전까지는 주 2회 화상 영어, 매일 루틴을 정해서 듣기, 읽기, 쓰기 연습을 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캐주얼한 대화는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판단하고 호주에 왔는데, 쿨하게 프리 토킹을 하는 상상 속 내 모습은 왕창 깨져버렸다.
한국에서 개같이 말해도 받아주고 기다려주는 선생님과 영어로 대화하는 것, 그리고 영어권 나라의 일하는 현장에서 쓰는 영어 감각에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나는 호주 외곽 지역의 한 5성급 호텔 레스토랑 팀에서 일했었다.
합격 소식을 들었을 땐 뛸 듯이 기뻤지만, 첫 출근 이후 나는 영어로 인한 여러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 일단 난 높은 레벨의 서비스를 요구하는 곳에서 일해본 적도, 심지어 코스 요리에 대한 지식도 전무해서 이 모든 것을 ’영어‘로 배우고 이해해야 했다.
또 다른 난관으로는 동료들의 제각기 다른 악센트였다. 호주 악센트만으로도 머리가 아픈데, 동시에 남미, 필리핀, 태국, 프랑스, 인도 등의 악센트에도 적응해야 했다.
가장 바쁜 조식 시간엔 여러 특이 사항에 대해 동료들과 소통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를테면, ‘음료 섹션에 주스를 채워야 해’라던가, ‘손님이 그릇을 깨뜨렸어.’ 등, 사소하지만 일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재깍 전달해야 하는 부분들. 정말 간단한 말들이었지만 그 말 한마디가 바로 나오지 않고 수도 없이 버벅거리다 결국 문장 하나도 제대로 못 뱉을 때, ‘내가 한국에서 했던 건 다 뭐였나’ 자괴감에 빠지곤 했다.
알아듣고 말이라도 하면 다행이지, 문제는 내가 동료들의 전달 사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었다는 것이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그들의 말을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거나 여러 번 되물을 수 없었고, 눈치로 대충 때려 맞추다가 일을 두 번 하게 만들었던 상황도 종종 있었다.
호주에서 반년 이상을 지내고 나니 다섯 번을 되물어도 못 알아듣겠던 그들의 억양에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고, 종종 용기 내 손님들에게도 너스레를 떨며 스몰톡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마음처럼 안 되는 영어 때문에 위축되는 날들이 있었다.
언젠가 한 번은 손님이 내게 30분 넘게 기다려도 음식이 나오지 않는다며 컴플레인해왔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핵심적인 뜻은 단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고, 겨우 몇 단어들만 캐치하여 전혀 다른 내용으로 이해했다.
그래, 변명을 대보자면 그들의 억양은 내가 익숙하지 않은 동유럽 쪽 영어 악센트였고, 동시에 말하는 속도가 너무 빠르고 속삭이듯 해서 거의 귀를 스치고 지나가는 정도였다. 나는 그 손님들이 한 차례 더 자신들이 한 말을 되풀이하고 나서야 그 뜻을 알 수 있었고, 내가 당황스러움으로 더 버벅거리고 있을 때 그들이 내게 쐐기를 박았다.
“우리 말을 이해하기에 네 영어 실력이 별로인 것 같은데, 너의 다른 동료를 불러오는게 좋겠어.”
수치심이었다.
가슴은 쿵쾅거리고 머리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나는 대충 얼버무리고 눈에 보이는 아무 동료나 붙잡고 저 사람들 좀 대신 맡아달라 부탁했다.
쪽팔림 끝엔 화가 났다. 자기네들도 네이티브가 아니면서. 근데 또 동시에 뭐라 할 말은 없었다. 레스토랑 측의 잘못으로 인한 컴플레인을 하는 상황이었고, 스태프가 자기네들 하는 말까지 못 알아먹으니 짜증 날 수 밖에. 결국, 못 알아들은 내 잘못인 거다.
서러운 마음에 친한 동료 중 한 명에게 이날 있었던 일을 토로했더니, “충분히 화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너한테 그렇게 얘기한 건 무례했다고 생각해” 하고 해준 말이 작은 위로가 되어주긴 했다...만,
어쨌든 내 영어 실력으로 인한 언어적 한계가, 호스피탈리 업에서 가장 중요한 손님과의 소통에 차질을 냈다는 사실은 변치 않았다.
호주 워홀에 다녀왔다고 하면 대부분 인종차별에 대한 에피소드를 묻지만 내가 경험했던 많은 경우는 내 부족한 영어 탓에 무시당한 일들이었다. 이런 무시당하는 것이 당연한 일은 절대 아니지만, 단순 여행객이 아닌 일하는 입장에서 요구되는 필수적 역량 중 하나이니 부족한 실력에 대해 변명할 말은 없다. 모두가 나에게 상냥할 거라는 기대 역시 접는 것이 좋다.
하지만 이런 무시가 흔하게 벌어지는 일도 아니니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입에 영영 붙지 않을 것 같던 영어 표현이 어느 날 자연스럽게 말에 녹아들기도 하고, 손님들이 쓰는 재치 있는 표현을 생생하게 배울 수도 있으며, 어떤 날은 마침내 “너 정말 프로페셔널하게 설명 잘 한다!” 하고 칭찬받는 날도 있다.
배우고자 하면 기회는 언제나 열려있으며, 내가 애쓴 만큼 바로 그 성장이 눈에 보이는 재미가 있달까. 호주 워홀 가기 전엔 영어 공부를 하던 것에 2배는 더 하고 가야 한다는 주장은 변치 않지만, 그럼에도 그냥 부딪혀 도전할 가치가 있다.
잊지 말자, 우리는 이 먼 타국까지 와서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소통하며 일을 한다.
부족한 점은 어렵지 않게 수백가지를 꼽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그 용기가 얼마나 대견한지, 자신의 부족함을 받아들이고 계속 나아가며 발전하는 그 모습은 얼마나 기특한지 칭찬을 아끼지 않을 일이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