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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어리 Jul 24. 2024

계획대로 풀릴 줄 알았지

완벽주의자의 호주 워홀; ep 1



브리즈번 공항을 나서자, 여름 끝자락의 더운 공기가 살에 닿았다. 시티로 가는 트레인을 기다리며 ‘호주 하늘은 듣던 대로 정말 맑구나-‘ 생각했더랬다.


미세 먼지 없는 하늘을 즐기기도 잠시, 도합 30kg이 넘는 캐리어 두 개를 끌고 역부터 호스텔까지 걸어가는 것은 고역이었다. 예상 경로가 도보로 15분이라기에, 이 정도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3월 중순, 호주는 가을에 접어든다지만 한낮은 여전히 후덥지근했고 난 처음 겪어보는 호주의 뙤약볕 아래서 묵묵히 녹초가 되어갔다.



겨우 도착한 호스텔에서 체크인을 마친 뒤 배정된 방의 위치를 확인하니 2층, 엘리베이터 없음.

마침 지나가던 투숙객 한 명이 “도와줄까?” 묻는데, 그때 무슨 생각이었는지 난 “괜찮아”하고 거절했다. 가진 것 중 가장 큰 캐리어를 들고 낑낑대는 내 모습이 말과는 다르게 전혀 안 괜찮아 보였는지, 그는 기꺼이 나서서 짐을 옮겨준다.


방으로 들어오니 2개의 벙커 침대는 이미 누가 쓴 흔적이 있고, 내 것으로 보이는 빈 침대는 한 구석에 덜렁 자리 잡고 있다. 모두의 시선에 완전히 노출된 1인용 싱글 베드. 분명 6인실을 예약했는데, 6인실보다 못 한 5인실에서 모두가 기피하고 싶은 저 침대가, 5일간 지내야 할 내 공간이라니.


장시간 비행과 이동 시간으로 체력이 너덜거리던 나는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몸에 힘이 조금 풀리자, 눈물이 났다. 너무 힘들었다. 한 것이라곤 이제껏 도착해서 호스텔에 체크인한 것뿐. 앞으로 가야 할 길이 구만리이건만 벌써부터 이렇게 힘든 일인가?


나는 그제야 이 여정이 비로소 시작되었음을, 워홀은 그저 낭만도 설렘도 아닌 철저한 현실임을 자각했다. 잠시 머물다 가는 여행의 설렘도 아니요, 그렇다고 믿을 구석이 있는 것도 아닌 이 곳에서 오롯이 내 선택으로만 채워진 1년을 보내야한다는 사실을 상상이 아닌 현실에서 느꼈을 때, 그것은 공포에 가까운 막연함이었다.



그로부터 나는 식욕을 잃어 밥도 제대로 먹지 않고 매일 밤 숨죽여 이불 속에서 울었다. 한국에서 계획했던 대로 해야 할 목록들을 하나씩 해 나가면서도, 너무 무섭고 막막했다. 이미 와 버렸으니 한 달도 안 돼서 돌아가긴 내 자존심이 상하고, 그러면 선택지는 그냥 ‘한다’인데, 정말 사소한 일 하나, 하나가 버겁고 공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중 가장 힘들었던 건 영어로 전화하는 것이었다. 버벅거리는 내 영어가 누군가에게 들릴까 봐 일부러 한적한 공원에서도 가장 인적이 드문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전화 버튼을 누르려는데 손가락이 이렇게 무거울 수가, 도저히 못 하겠다. 이런 나 자신이 너무 한심해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이걸 하지 않으면 그다음은 없다는 생각에 눈 딱 감고 한 번, 또다시 한번.


내 처음 계획은 브리즈번에 도착하여 농장 일을 연결해 주는 그 주변 지역 워킹 호스텔이나 페이스북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농장 구인 글에 연락해 농장 일을 구하는 것이었다. 내가 가는 시기에도 일이 있는지, 주변 호스텔은 어디가 후기가 좋고 일을 잘 연결해 주는지를 철저히 조사했다고 생각했건만 애석하게도 어떤 곳은 연락을 안 받거나, 또 어떤 곳은 2달 뒤까지 예약이 꽉 찼다거나, 또 다른 곳은 자리는 있지만 일을 하기까지 한 달을 대기해야 한다고 했다. 도서관에 앉아 페이스북을 뒤지고, 안 되겠다 싶어 절대 기웃대지도 않을 거라고 다짐했던 한인 사이트까지 들어가 농장 일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호주 워킹 홀리데이는 88일 동안 농장, 공장 혹은 시골 지역에서 특정 직업군의 일(카페, 식당도 포함)을 하면 호주에 1년 더 머무를 수 있는 비자 신청 자격이 주어진다. 내가 처음부터 농장으로 가려고 했던 건, 작은 시골 지역에서 식당이나 카페 일을 구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불확실성이 농장 일을 구하는 것보다 막연히 더 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가 농장 일을 구하려고 하면 할수록, 길이 안 보였다. 게다가 난 차도 없었기 때문에 직접 농장을 돌아다니며 컨택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매일 노트북을 붙잡고 실시간으로 돌아가는 상황들을 확인할수록, 애초에 내 계획에도 없던 선택지가 점점 선명해졌다. 아니, 결심을 하기도 전에 이미 머릿속으로 결론이 지어졌다.


지역 이동을 해야 한다.

애초에 계획에도 없던 곳으로 가야 한다.

아니 난 처음부터 계획대로 풀릴 줄 알았지. 그래서 이력서도 안 써왔는데... 내 오만함을 탓하며 백기를 들었다. 주섬주섬 노트북을 꺼내 이력서부터 쓰기 시작한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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