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주의자의 호주 워홀; 프롤로그
새벽 5시 출근, 오후 12시 퇴근.
점심을 먹고 정리한 뒤 영어 공부를 하기 위해 노트북을 열었다. 호주 퀸즐랜드주 북쪽에 위치한 어느 휴양 도시의 한 호텔에서 일을 시작하고 생활이 조금 익숙해질 때쯤 시작한 루틴이다.
노트북을 켜자마자 자동으로 설정된 프로그램 몇 가지가 열렸다. 업데이트를 이유로 돌아가는 아이콘과 빨갛게 뜬 숫자 알림들, 부산스럽게 열린 빈 창들. 갑자기 숨이 턱 막힌다. 이유 모를 압도감과 불편감에 신경질적으로 X 표시를 누른다.
호주 워홀에 가기 위해 휴학하기 전, 2년간 나는 앞만 보고 달렸다.
스물 셋, 남들보다 늦게 대학에 입학했고 늦은 만큼 숙고하여 결정한 학업이었으니 절대 헛되이 보내지 않으리란 생각에서였다. 학업적인 면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면에서도 오롯이 내가 책임져야 했다. 애초에 부모님의 지원을 바라지 않고 선택한 길이니까. 그래서 매 학기 전액 장학금을 받을 수 있도록 성적에 매달렸다. 혹시 모르니 안전하게 전 과목 A+을 받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하며.
성적을 잘 받는 방법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출결은 기본으로 챙기고 한 주에 공부한 것은 그 주에 복습하고, 교수님의 스타일을 파악하고, 공부에만 매달리면 되었다. 입학 후 첫 학기는 무언가에 몰입한다는 감각에 재미를 느꼈다. 성적도 원하던 대로 전 과목 A+. 결실은 달콤했지만, 위험할 정도로 중독 적이었다. 다음 학기도, 다 다음 학기도 똑같이 4.5 학점을 받아야 한다는 이상한 강박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 자신을 몰아붙일수록, 아이러니하게도 결과는 모두 좋았고 이것은 나를 차츰 갉아 먹었다.
반복되는 매일의 할 일이 내 스케줄러에 쓰였고, 그 모든 것들을 단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면서 100퍼센트의 완벽한 퀄리티로 해내고 싶었다. 내 노트북 창엔 쉴 새 없는 공지 알림과 조별 과제 그룹 채팅방의 말풍선들, 과제를 위해 열어 놓은 문서의 빈 창들, 활자가 끝없이 이어진 논문 파일들… 불안으로 잠들지 못하는 밤이 잦았고, 사소한 실수 하나라도 생기는 날엔 머리가 핑 돌며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심장이 뛰었다. 홀로 기숙사 책상 앞에 앉아 몸 밖으로 튀어나올 듯 진동하는 심장을 다독이며 ‘이건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그때 그 마음의 긴장감은 호주에 오면서 사라질 줄 알았다. 하지만 내 몸의 세포 하나하나는 그것을 잊은 적 없다는 듯, 아주 간단한 일상적 행위로부터 촉발되어 갑작스럽게 들이닥쳤다. 나는 즉시 노트북을 닫고 방에서 나와 물을 마셨다. 조금 전 불쾌하게 훅 끼쳐 온 그 감각에 대해, 그 감각에 매 순간 절여져 있던 그 시간에 대해 떠올렸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 감각으로부터 최대한 멀어지고 싶다. 다행인 건, 이 순간 나는 호주에 있다는 사실이다. 더 이상 누군가에게 완벽해 보일 필요도 없고, 결과를 위해 나를 갈아 넣을 필요도 없는 온전한 시간이 내게 주어졌다. 내가 이 곳에서 해야 할 일이라면 몸과 마음의 긴장을 말랑하게 만드는 것. 그런 의미에서 호주는 완벽한 환경일 것이다.
물컵을 씻어 내려놓고 방충망도 없이 활짝 열어 놓은 문 너머 마당으로 나가본다. 버석한 바닥과 한 몸이 되어 나른하게 자리잡은 털 동물 하나. 내가 사는 셰어 하우스 단골인 고양이 오스카는 인기척에 흠칫 고개를 들더니 나인 것을 발견하고 이내 제 머리를 다시 내려 놓는다. 나는 그런 오스카의 옆에 쭈그리고 앉아 그의 이마를 부드럽게 긁는다. 선선한 바람이 내 앞머리와 털 찐 고등어의 방실한 털을 흔들고 간다. 느릿하지만 리듬감 있게 부풀었다 줄어드는 오스카의 배를 보다 괜히 그에 맞춰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어 본다. 숨에 섞여 들어오는 바람이 제법 달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