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주의자의 호주 워홀; episode5
획일성을 추구하는 한국에서 살다 호주로 넘어오면 자유로움을 느낀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특히 외모에 대한 지나친 잣대가 존재하는 한국에서 지내다 무엇을 입든, 어떻게 생겼든 신경 쓰지 않고 굳이 평가하지도 않는 호주의 사회적 분위기가 더욱 해방처럼 느껴질 수 있겠다.
나 역시도 호주에서 이런 해방감을 맛보길 기대했었다.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입고 싶은 것을 입고, 내 바디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를. 하지만 그저 호주에 발을 딛었다고 해서 내 평생 쌓아온 생각 패턴이 마법처럼 변신하듯 바뀌지는 않았다. 이 자유로움을 누리기 위해서는 연습과 적응이 필요했다.
나는 여전히 밥을 먹고 친구들과 후식으로 버블티를 마시러 가는 길에 살이 찔까, 옷 틈 사이로 뱃살이 집혀 보이는 것을 걱정했다. 내 겨드랑이가 깔끔하게 보이지 않을까 봐(이를테면 마치 아이돌들의 새하얀 겨드랑이처럼 보이지 않을까 봐) 팔을 들어 올리는 것을 자제하려 했다. ‘아, 이거 먹으면 살찌는데.’하고 말하는 나를 보며 한 친구가 ‘여긴 호주잖아. 여기 사람들은 그런 거 신경도 안 써’ 말해주기도 했지만, 2n 년간 내 뼛속, DNA 깊이 새겨진 ‘한국식 외모 강박’을 내려놓지 않는 이상, 그 누가 신경 쓰지 말라고 한들 그건 소용이 없었다.
내 몸 부위를 나노 단위로 쪼개어 평가하던 외모 강박 외에도, 내가 가진 동양인에 대한 편견 역시 나를 해방감과 멀어지게 한 요인 중 하나였다. 정확히 하자면, 서양인이 가질 수 있는 동양인에 대한 인종차별적 이미지를 나 자신에게 투영하고 있었다.
나는 친화력이 좋지 않은 내향인이었고, 한국에서는 개방적이고 내 줏대가 있는 편이라 생각했지만, 낯선 땅에 나 혼자 똑 떨어져있다는 감각은 어딘가 나를 주눅 들게 했다. 무엇보다 나는 누군가가 나를 판단할 때, 내가 ‘동양인이라서’ 내성적이고, ‘동양인이라서’ 소극적이라는 그 스테레오 타입 안에 속하게 되는 것이 싫었다. 속으로는 여전히 ‘한국식 외모 강박’에 괴로워하면서도, 겉으로는 보수적인 동양인처럼 보이는 것이 싫어 원하지 않는데도 일부러 노출이 있는 옷을 골라 입은 적도 있었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내가 알던 나는 이게 아닌데. 나는 마음이 내키지 않는 건 쳐다도 안 보는 호불호가 명확한 인간이었는데. 여태껏 나를 지탱하던 건 뭐였지? 한국에선 분명 존재했던 것들이 왜 여기선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걸까? 왜 나는 동양인인 내 이미지가 달갑지 않을까?
집이나 일에 대한 불행한 상황들은 예상했었지만, 사춘기 때나 하던 내 정체성과 자존감에 대해 다시 고민하게 될 줄은 몰랐다.
말이 쉬워 워킹 홀리데이지, 연고도 없는 곳에 자리 잡아 일상을 만들어간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어쩌면 자신의 근간과 가치관이 흔들릴 만큼, 아예 바닥부터 다시 쌓아야 할 정도로 여파가 큰 변화일 수 있다. 어디서든 적응력 하나는 자신할 정도였는데 가족도, 친구도, 집도, 일도 없는 낯선 땅에서의 ‘나’는 겨우 기본 아이템만 장착한 쪼렙 그 자체였다.
한국을 떠난 용기도,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는 막연함과 압박감을 견뎌내는 ‘존버’ 정신도 시간 지나면 대견하다 해 줄 일이지만, 그 한 가운데 있을 땐 내가 그렇게 작고 초라할 수가 없다.
호주에 온 이상, 나는 천천히 내 속도에 맞추어 이 해방감과 가까워져 보기로 했다. 감정 자체를 좇기보단 나의 평온함에 집중하는 것. 어떤 환경에 던져지든 내가 나다울 방법이 있다면 그 시작은 먼저 나 자신에게 너그러워지는 것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