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카 시대의 사람들은
쿠스코가 세계의 배꼽, 즉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다.
잉카인들은
그 쿠스코를 중심으로
그들의 세력을 확장해 나갔고
쿠스코는 자연스럽게 잉카인의 흔적들로 채워졌다.
따라서 오늘날
쿠스코는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잉카의 역사적인 문화 유산이 가득한 곳이 되었다.
그 문화 유산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두 가지 유산은
태양의 신전인 코리칸차와 삭사이와망이라 할 수 있다.
잉카 제국을 삼킨 스페인 침략자들은
쿠스코에서 잉카 제국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태양의 신전을 헐고 그 위에 산토 도밍고라는 교회(수녀원)를 세웠다.
스페인 침략자들의
잉카 흔적 지우기 정책으로 인해
쿠스코에서 옛 잉카의 흔적이 많이 사라졌지만
잉카의 심장답게 쿠스코에는
쿠스코 외곽 뿐만 아니라 쿠스코 시내 곳곳에도
잉카 시대의 여러 유적들이 남아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코리칸차이다.
코리칸차(Qorikancha)는
쿠스코의 중심인 아르마스 광장에서
아베니다 Sol(솔 거리)을 따라 10분 정도 내려가면
왼쪽에 보이는데 산토도밍고 교회(수녀원)와 같은 장소에 있다.
코리칸차는 께추아어로
황금으로 둘러쌓인 신전이라는 뜻인데
당시에 태양의 신에게 제사하던 장소로 추정되고 있다.
지금도 쿠스코인들은
중요한 날에 코리칸차에서
그들의 조상들이 제사하던 것처럼
각종 의복을 차려입고 제사 의례를 재현하기도 한다.
행사를 재현하는 날이면
이 광경을 보기 위해 관광객은 물론이고
쿠스코 현지인들도 몰려와 행사장 주변은 인산인해를 이룬다.
코리칸차 초석 위에 세워진
산토 도밍고 교회는 코리칸차와 더불어
멋진 모습을 보여주는데 특히 야경이 아름답다.
코리칸차 안에는
태양신을 상징하는 황금 장식품과 더불어
700장의 순금판으로 벽 전체가 도배되어 있었다.
잉카의 왕 아타우알파가
피사로의 스페인 군대에게 사로잡혔을 때
몸값으로 12평의 방안에 금을 가득 채워 주었는데
그 금의 상당수를 코리칸차에서 조달했다고 한다.
또한 스페인 침략자들은
사원 외벽과 내부에 있던 모든 금을 벗겨
금괴로 만들어서 스페인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이로 인해 스페인은
넘쳐나는 금 때문에 인플레를 겪었는데
피사로가 아타우알파에게서 받은 몸값과 더불어
코리칸차에서 약탈해 간 금이 5,000kg에 달했다고 한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스페인의 침략자들은
코리칸차를 헐고 그 위에
산토 도밍고 교회를 세웠는데
이 교회는 코리칸차의 초석 위에 세워졌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 초석을
완전히 무너뜨리지 않았는지
자세한 역사적인 서술이 없기 때문에
학자들은 두 가지 추측을 제시한다.
첫 번째 추측은
초석을 전부 무너뜨리는 것보다는
그 초석 위에 건축하는 것이 비용을 아낄 수도 있고
공사 기간도 단축할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또 다른 이유는
코리칸차의 초석이 워낙 튼튼하여
무너뜨리기 힘들어서 그냥 초석 위에 교회를 세웠다는 추측이다.
잉카인들은
돌을 쌓을 때 돌에 홈을 파서
돌과 돌 사이를 청동 주물로 연결했는데
이렇게 연결된 두 돌은
돌 사이의 이음새가 완벽해서
돌을 서로 쉽게 떼어 내거나 무너뜨릴 수 없었다.
스페인 침략자들이
코리칸차의 초석들을
완전히 허물지 못한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잉카인들의 석조 기술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설명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예가 바로 코리칸차이다.
산토 도밍고 교회는
1610년에 1차 완공되었는데
1650년의 쿠스코 지진 때 무너졌다.
이 지진이 일어났을 때
비록 교회는 무너져 내렸지만
코리칸차의 기초석은 멀쩡했다.
1680년에 복구되기 시작한 교회는
1950년에 발생한 진도 6.9의 지진에 다시 무너졌는데
이번에도 역시 코리칸차의 기초석은 거의 손상되지 않았다.
이처럼 코리칸차는
진도 6.9의 지진에도 견딜 수 있는데
이것은 당시 잉카인들의 석조 기술이 얼마나
뛰어나고 대단한 것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코리칸차를 이야기 할 때
산토 도밍고 교회가 같이 나오는 이유는
코리칸차 위에 산토 도밍고 교회가 건축되었기 때문이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코리칸차의 기초석 위에
산토 도밍고 교회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코리칸차의 신전과
방으로 사용된 건물 일부를 남겨 두었는데
이 신전과 방의 흔적들에서 당시의 건축 형태를 볼 수 있다.
잉카인들은 코리칸차를
잘 다듬어진 돌이나 바위를
벽돌처럼 차곡차곡 쌓아 올렸는데
이러한 건축 방식을 Ashlar Masonry 라고 한다.
특히 코리칸차에 사용된 돌은
함부라비 법전이 기록된 바위와 같은 섬록암인데
섬록암(diorite)은 화성암의 일종인 매우 단단한 암석으로
당시 기술로는 가공이 쉽지 않은 암석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교회 내부의 코리칸차의 신전 일부가
14각으로 길게 다듬어 세워진 벽면으로 남아 있는데
이것은 현대의 기술로도
다이아몬드처럼 강력한 절삭기를 비롯한
다양한 건축 도구가 있어야만 건축이 가능하다고 한다.
교회 내부에는
코리칸차가 파괴되기 전
당시의 신전 모습의 형태가 남아있는데
스페인들은
신전 건물을 허물지 않고
다른 용도의 방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산토 도밍고 수녀원은
아름답고 유려한 건물로 지어졌는데
지금의 건물은 1950년의 지진 후에 재건축된 것이라 한다.
산토 도밍고 수년원의 종루에 올라가면
사방으로 펼쳐진 쿠스코의 전경을 볼 수 있다.
종루로 올라가는 계단...
코리칸차 왕실의 정원에는
금과 은으로 만든 아름다운 조각상들이 있었으며
황금 옥수수와 황금 감자, 그리고 황금 꽃으로 장식되어 있었다고 한다
남미를 수탈한
스페인의 침략자들은
막대한 양의 금을 본국으로 실어 날랐지만
이것은 후에
스페인의 극심한 인플레를 유발하여
스페인이 서서히 몰락하는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당시 인플레가 뭔지도 몰랐고
인플레에 대한 개념 조차도 없었기 때문에
스페인은 넘쳐나는 금으로 인하여 물가가 폭등했고
결국 스페인 정부의 재정적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 여러 번 디폴트가 선언되었다.
그리고 1588년,
칼레 해전에서 스페인의 무적 함대가
영국의 해적 출신인 드레이크의 함대에 깨어지자
남미에서 승승장구하던 스페인은 완전한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거대한 바위를
무우나 두부 자르듯
매끈하게 가공할 정도로
정교한 석조 기술 능력을 가졌지만
아시아와 유럽, 심지어 아프리카도
수 천년 전부터 바퀴를 발명하여 사용했는데
안타깝게도 잉카인들은 수천 년 후에도 바퀴를 발명하지 못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했다.
남미에 수레나 바퀴를 끌만한 말이나 소가 없으니
어쩌면 바퀴를 발명할 생각을 못했는지도 모른다.
역사에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잉카 제국에 말과 바퀴와 수레만 있었다면
세계 역사는 분명 지금과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쿠스코의 걸어보고 싶은 길 바로가기 ⇒ https://blog.naver.com/westtour/2233770458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