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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반지 May 23. 2021

40대 늦깎이 공무원의 슬기로운(?) 공직생활

공무원의 영혼을 갈아 넣은 '적극행정'

나는 국가직 면접을 준비하면서 전 정세현 총리의 적극행정의 신봉자가 된 적이 있었다. 일하다 깨지는 접시는 괜찮지만 일을 하지 않아 접시에 먼지가 쌓이는 것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총리님의 취임사를 외우고 또 외워서 면접시험 당일 날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또박또박 큰 소리로 외쳤다.

공무원의 적극행정으로 국민들의 삶이 조금 더 편해진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이던가.


계속 쌓여만 가는 나의 일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 업무를 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기에 내가 아니면 00시의 그 누구도 육아기근로시간 단축급여를 받을 수 없기에 두꺼운 사명감을 가지고 주 7일 일을 하는 것을 온몸으로 인정하고 인정하기를 수십 번 하여 내 정신세계의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민원인들이 전화가 와서 '내 단축급여 언제 나오냐, 나한테 급여를 줄 수 있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냐 업무 대체자가 없냐'라고 하면 당당히 말한다.

'그 일을 하는 사람은 밖에 없습니다. 기다려주셔야 합니다. 신청한 순번대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전화들로 일처리는 더더욱 늦어진다.

그런데  어느 월요일 오후 4시경 본부의 적극행정 오더가 떨어졌다.


육아휴직사후지급금이라는 제도가 있다. 이 제도로 말하자면 육아휴직 종료 후 복직하여 6개월 근무 후 이 지원금을 신청하면 육아휴직 기간 동안 덜 받았던 일부의 잔여 육아휴직 지원금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근로자들이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신청하지 않아 쌓여있는 육아휴직 사후지급금이 수천 건이라는 것이다.


목요일 퇴근 전까지 수천 건의 이 지원금 대상자들에게 연락을 하고 지급을 하라는 것이었다.

일처리를 할 수 있는 시간은 월요일 오후 4시, 화요일, 수요일은 공휴일, 그리고 목요일 오후 6시까지였다. 정확히 몇 천 건인지는 우리가 놀랄까 봐 알려주지도 않았다. 그냥 모성 업무를 하고 있는 기간제 2명과 공무원 3명이 해야 할 적극행정이었다.


은행에서 찾아가지 않은 잔고 지급액을 문자로 알려주고 찾아가세요 했던 것과 흐름이 비슷하다. 하지만 이건 일일이 이 지원금의 대상자인지 1차 시스템을 통해서 확인해야 하고 전산으로 확인되지 않는 것은 민원인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확인을 하거나 사업장에 확인해야 한다. 그 후 관련 서류를 받고 서류가 미흡하면 보완서류를 받고 검토보고서를 만들어 결재를 올리면 지급이 되는 구조였다.


우리 개개인의 업무는 모두 스톱되었다. 월요일 퇴근 즈음 놀란 마음에 뭘 부터 해야 할지 몰라 퇴근을 하고 화요일 하루 종일 전화를 받고 전화를 했다. 전화는 오후 6시 퇴근시간 이후에도 이어졌다. 저녁 8시, 9시 고용센터입니다 라고 전화를 하니 모두 의심의 목소리로 답을 하다가 지원금의 대상자가 될 수도 있다는 말에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곤 했다.


다행히 대상자가 되어 잊고 있었던 공돈이 생겨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여차저차 확인해보니 대상자가 안 되는 사람들은 왜 이 시간에 쓸데없이 전화해서 기분 나쁘게 하냐 등, 나라 비판, 제도 비판, 공무원의 업무태도 비난 등 한참을 말한 후 전화를 끊었다.


몰랐거나 잊었거나 했던 지원금을 알려주고 뒤늦게라도 지급한다는 취지는 아주 좋은 것이다. 만약 내가 몇 년 동안 잊고 있었던 그런 나의 지원금(?)을 받게 된다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나도 이 업무를 하면서 알게 됐는데 나도 대상자 명단에 있었다. 이전 회사에서 육아휴직을 한 적이 있으니 당연히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 역시 이래저래 조건들을 확인해보니 최종 지급대상자는 아니었다. 잠깐이었지만 갑자기 200만 원 정도의 돈이 생긴다니 기분이 좋았었다. ㅎㅎ


잠깐 옆길로 빠졌지만 그래, 실제 일선에서 공무원들의 적극행정은 이런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드니 왠지 모르게 자괴감이 들었다.


어떤 민원인은 보이스피싱을 의심하며 본인의 주민번호 확인을 거부하기도 했다. 어떤 민원인은 고마워했다. 어떤 민원인은 의심을 했고, 어떤 민원인은 대상자가 안 된다고 하니 청원을 올리겠다고 했다.


내 원래의 업무에서 각종  지원금을 받지 못한 민원인들의 불만 섞인 전화들이 이어졌다. 목요일부터는 사후지급금 내용을 간단하게 전달받은 민원인들이 본격적으로 담당자인 우리에게 몰려들었다. 급기야 금요일에 회사 나오는 게 두려웠다.


좋은 일이다. 좋은 제도이다. 좋은 취지를 가지고 있다. 다시 봐도 다시 생각해봐도 정말 정말 박수 칠 정도로 좋은 지원금이다. 그런데 수년 동안 쌓여있던 수천 건을 5명이 일주일 안에 해야 한다. 그게 문제다. 그중 2명은 한 달도 못 채운 기간제 근로자들이고 한 명은 한 달 업무를 한 신입 공무원이다. 게다가 5명 모두 이 업무는 처음이었다.  


이것이 적극행정의 민낯이었던가.

공무원의 영혼을 갈아고 공무원의 영혼을 티끌까지 끌어모은 것이 적극행정이라는 이름을 달고 돌아다니고 있었던 것인가.


오늘 내가 본 이것이 제발 적극행정의 전부가 아니길 바란다. 매우 안 좋은 예를 경험한 것이라고 ,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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