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에서 듣기엔 아주 낯선 단어였다. 그래서 그 억양과 그 단어가 내 귀에 훅 들어왔다.
그다음부터는 우리 모두를 경악하게 할 만한 단어와 행동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공무원이나 공무직 면접 준비를 할 때 일 순위 예상 질문 중 하나가 악성민원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이다. 그래서 유튜브에서 관련 영상도 많이 보고 답변을 준비했었다. 특히 기억나는 영상은 충주시 홍보맨의 악성민원인 모의 훈련 영상이었다. 홍보맨 인 실제 8급 공무원의 실감 나는 연기에 박수를 쳤다. 그리고 한편으로 실제로 저 정도로 하는 민원인이 있을까라는 의문도 들었다. 좀 과장된 거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많은 악성민원 관련 영상을 본 후 악성민원과 관련된 질문에 이런 답변을 준비했었다.
<따뜻한 차 한 잔을 가져다 드린 후 흥분을 가라앉히게 한다. 그 이후 민원인에게 담당자로서 차근차근 설명을 해 드리고 이해를 구한 후 민원인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다른 부분들이 있는지 더 알아봐 드린다.>
취업준비생의 저런 답변은 참으로 현실 앞에서 그저 초라하고 쓸데없는, 힘없는 단어들의 모임일 뿐이었다.
늘 그렇듯 현실은 영화나 드라마 그 이상이었다.
핵폰탄처럼 찾아온 민원인의 만행은 이어졌다.
"네가 뭔데, 네가 무슨 권한으로 나한테 돈을 안 주는 거냐고!! 너 뭐야"
상황은 이랬다. 어떤 지원금이 있는데 순서가 1번 하고 2번 해야 나가는 지원금이었는데 이 사업주는 2번 한 후에 1번을 한 것이다. 단순 순서가 바뀐 게 아니라 부정이 의심되는 정황도 있었다. 이 경우는 촘촘하게 연결된 고용보험시스템에서 간단히 확인되며 깊게 검토할 여지도 없이 부지급 처리 대상이다. 그럼에도 담당 주무관 대부분 사실관계를 좀 더 확인해서 단순 행정업무의 실수였다면 구제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들을 제시해준다. 하지만 이 사례의 경우는 이미 일하고 있는 사람을 새로 고용한 것처럼 한 것이며 그 사실은 근로자들과의 면담에서 모두 확인한 상황이었다.
담당주무관님은 20년 가까이 되는 베테랑 공무원이었다. 주무관님도 밀리지 않으셨다.
"사장님, 제가 다 설명을 해 드릴게요. 사장님 요즘 코로나로 힘든 거 알지만 이렇게 보시다시피 이 지원금의 조건이 이런이런 지침과 법령에 의해 주게 되어 있고 그 판단은 담당자인 제가 합니다. 제 판단에 이의가 있으시면 문제를 제기하시면 됩니다. 관련 절차도 다 설명을 해 드릴게요"
민원인의 흥분은 밀물과 썰물처럼 확 몰아치더니 또 한 순간 훅 하고 꺼지기도 했다. 훅 꺼지는 순간순간마다 담당 주무관님이 흔들림 없이 차근차근 설명을 했고, 결론적으로 지원금을 받을 수 없다는 부분에 이르면 항상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쌍욕을 했다.
팀장님도 중간중간 오셔서 욕하지 말고 고함지르지 말고 얘기를 하라고 몇 번을 말했지만 민원인의 흥분은 이제 욕에 과격한 행동까지 더해지기 시작했다.
"씨 x! 다 나와. 아까 저기서 튀어나온 놈(팀장님) 너 이리 와 다시 얘기해봐 뭐 고함을 지르지 말라고
내가 낸 세금에 욕하고 고함지를 권리 다 포함돼 있어. 내 세금으로 이 사무실이랑 너네 월급도 주는 데 내가 왜 고함을 못 질러, 빨리 돈 내놔, 돈 주라고"
경찰을 부르기 직전 갑자기 흥분이 가라앉은 민원인은 선심(?) 쓰듯 이번엔 문제제기를 하지 않겠다면서 5월부터는 확실히 지원금 정책을 나한테 제대로 알려달라며 쿵쿵 소리를 내면서 사무실을 나갔다. 한 시간 넘게 단지 듣기만 했는데도 나는 머리에 두통이 왔다. 그 사람이 뿜어내는 기운에 내 기운이 다 시들어져 버린 느낌이었다.
담당 주무관님은 시크하게 다른 업무들을 이어하셨다. 그 주무관님도 사람인데 힘들셨을 것인데 그래도 연차가 있으신 주무관님이라 후배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안 보이려 그러셨는지 알 수 없지만 별일 없었다는 듯 자리를 지키셨다.
국민의 권리가 무엇이었나. 학창 시절 배웠던 것 같은데 금방 생각이 안 났다. 급 찾아보니 국민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권리가 보장되어야 하는 데 여기엔 평등권, 자유권, 참정권, 청구권, 사회권이 있다고 한다. 거기엔 공무원에게 욕하고 고함을 지를 권리는 없었다. 우리가 배웠던 국민의 4대 의무 중 납세의 의무에서도 아무리 찾아봐도 세금을 내면 공무원에게 욕하고 고함을 지를 권리를 포함하고 있다는 내용은 없다.
세금을 낸다면 공무원에게 욕하고 고함을 질러도 되는 건가.
우리 집 초등학교 4학년 아들이 잘하는 유치한 논리로 이어가 본다면 우리가 돈을 내는 모든 것들에 고함을 지르고 욕을 해도 된다는 말이 된다. 그분도 음식점 사장님이었는데 그렇다면 돈을 내는 모든 손님들이 사장님에게 욕하고 고함을 질러도 된다는 것인가.
행정학의 대가인 모 교수님이 논문을 하나 작성하면 정립이 될 문제인가.
겨우 시보인 나도, 오늘도 맡은 지원금에서 하루에 두세 건은 '부지급' 처리를 해야 하는 판단을 하게 된다. 지원금 조건을 충족하지 못해 지원금을 못 받은 사람들이 매일 저런 마음으로 나에게 고함을 지르고 욕을 한다면 난 제대로 판단할 수 있을까.
우리가 낸 세금은 우리가 만든 법에 의해 올바르게 쓰여야 하며 그 전달자의 임무를 맡은 내가, 공무원들이 두려움에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세금들은 갈 길을 잃을 것이고 우리가 만든 제도들은 무너질 것이다.
그나마 천만다행인 것은 '공부'만 하다 공무원이 된 그 공무원들이 은근 허술하지 않다는 것이다. 석 달 가까이 본 우리 조직의 선배 주무관님들을 보니 그들은 겉보기에 조용하고 소심하고 겁 많아 보여도 저렇게 시끄럽게 우기기만 하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쉽게 지지 않는 두툼한 공직의 심장을 한 개쯤은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두툼한 공직의 심장은 어떻게 생기게 됐을까.
그 심장은 바로 오늘 같은 날을 본 날부터 시작해서 수없이 저런 날들과 맞닥뜨리며 나 같은 시보 시절부터 조금씩 살이 붙기 시작해 점점 근육이 붙어 단단한 공직의 심장이 됐을 것이다. 나도 오늘의 저러한 특별? 민원과의 시간을 단단하게 이겨낸 내공이 깊은 선배 주무관처럼 될 수 있을까. 나도 두툼함 공직의 심장을 한 개쯤은 가질 수 있을까?
영화 쿵푸팬더에서 우그웨이 대사부는 복숭아나무 아래에서 인간이 노력하여 바꿀 수 있는 것이 많이 있지만 복숭아나무가 아니라면 그 무엇도 복숭아꽃을 피우지 못한다고 했다. 선배와 같은 심장은 아니겠지만 늦깎이 공무원으로 나만의 복숭아꽃 같은 공직의 심장이 만들어지는 그날까지 걸어가 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