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반지 Apr 15. 2021

40대 늦깎이 공무원의 슬기로운(?) 공직생활

고노부 룩을 아는가

발령받은 첫날,  동기 모두 까만색 정장을 입고, 까만색 정장 구두를 신고 하루 종일 지청부터 센터까지 거의 모든 직원분들에게 인사를 하러 돌아다녔다.  센터 소장님께서 퇴근할 때 즈음 우리가 모두 지쳐 보였었는지 내일부터 전투복으로 입고 오라고 하셨다.


그래서 난 정말 내가 전투복이라고 생각하는 청바지를 입고 운동화를 신고 갔다. 그런데 다음 날 청바지는 입지 말라는 윗분들의 간접적인 의견 제시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다른 선배들은 그런 의견들은 흘려버리라고 했지만 갓 출근한 신입에겐 한마디 한마디가 귀에 박혔다.


그렇게 하나둘씩 우리 동기들은 우리도 모르게 고노부룩(?) 아이템들을 하나둘씩 입기 시작하다가 근무한 지 한 달 즈음되었을 때 우리 모두 완벽한 고노부룩을 재현하고 있었다.


발령 첫날, 우리가 관찰한 고노부의 직원들은 비슷한 옷들을 입고 있었다. 우리는 이 룩에 이름을 붙이자고 했고 바로 '고노부룩'이라고 명명했다. 이 룩의 가장 큰 특징은 누가 누군지 멀리서 보면 구분이 잘 안 된다는 것이다. 모두 그냥 하나의 무리를 이룬 고노부 직원일 뿐 개인은 없다. '개인'이 드러나면 안 되는 곳. 미션을 받고 움직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ㅎ)  '개인'을 누가누가 최고로 잘 숨기는가 대회를 한 것처럼 그래 보였다.


우리저 '개인'을 잃어버린, 또는 잃어버린 척해야 하는 거대한 물결로 들어갈 생각을 하니 웃기기도 하고 왠지 모르게 빨리 저 물결로 들어가지 않으면 고노부인이 안 될 것 같은 불안감도 몰려왔다. 아래와 같은 경량 패딩조끼는 고노부룩을 완성하는 최고의 필수품이었다. 네이비, 그레이, 검은색들의 바지와 셔츠.


나는 그래도 밝게 보이고 싶어 베이지 경량 패딩조끼를 샀으나 이틀 만에 후회했다.

각종 서류가 남긴 흐릿한 거무스레 잉크가 깃털모양으로 퍼져있거나 야근 때 먹었던 짬뽕 국물과 짜장면 국물이 튀어서 지워지지 않았다. 선배들의 선택이 다 맞는 건 아니겠지만 웬만하면 다 맞는 듯하다.


어떤 동기는 "난 아직 고노부룩을 입고 있지 않다"며 강렬히 저항(?)했지만 이미 네이비 카디건과 검은색 슬랙스로 '개인'을 가리고 있었다. 그래도 블랙 경량 패딩조끼는 끝까지 입지 않겠다던 다른 동기도 날씨가 풀려 외투를 벗은 어느 날 '고노부 조끼'를 입고 있었다. ㅎ


함께 살고 있는 지방직 공무원인 우리 신랑은 10여 년 전 옛날 옛적 근무한 지 1년 즈음됐을 때 대학교 동창을 만났는데 그 친구가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왜 공무원은 다 비슷한 머리스타일과 비슷한 옷을 입는지 모르겠다. 너도 이제 공무원처럼 입는구나"

나는 뭐 계속 봐서 몰랐다. ㅎㅎ


그런데 나도 어느새 우리가 고노부 룩이라며 까르르 웃어댔던 그 스타일의 정점을 찍으며 출퇴근을 하고 있다. '분위기'라는 것을 거스르는 게 쉽지 않은 일 같다. 나는 공무원이 되면 어떻게 입어야지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이렇게 빨리 고노부룩으로 변신할지 몰랐다. 나는 참 적응이 빠르다. ㅋㅋㅋㅋ


물론 조금 자유롭게(?) 입는 선배들도 일부 있다. 하지만 며칠 더 관찰한 결과 결국 고노부룩에서 멀리 가지는 않았었다. ㅎㅎ


벌써 여름의 고노부룩 필수 아이템이 궁금해진다.




이전 05화 40대 늦깎이 공무원의 슬기로운(?) 공직생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