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2월 5일에 업무를 배정받아 열심히 배우고, 적응하고 겨우 할 만 해졌는데 말이다.
3월 말 어느 주말, 여느 때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주말 근무를 하고 있는데 뒤에서 어두운 그림자 하나가 다가왔다. 팀장님이었다. 말을 건네셨다. "일은 할 만해요"
내가 말했다. "네! 한 달 지나니 조금 적응된 것 같아요"
팀장님이 그랬다. "적응됐다고 하니 미안한데 업무를 바꿔야 할 것 같아요."
그 이후로 나는 '코로나'와 '고용노동부'라는 단어가 반죽이 된 말들을 오랫동안 들었다.
그래서 지금 내 업무는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급여와 배우자 출산휴가 급여와 고용보험 미적용자 출산휴가 급여를 담당하고 있다. 이틀에 걸쳐 3개의 업무를 배우고 3일째 되는 날부터 3개 급여신청서들의 담당자는 내가 되었다. 00 광역시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급여는 나 혼자 한다. 놀랄 일은 아니다. 다른 동기들도 대부분 그렇다.
출산율이 낮아지면서 이런 종류의 지원금은 수요가 줄어들고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예전엔 몰라서, 주위 눈치가 보여서 사용 못했다면 지금은 자유로운(?) 시대적 분위기를 타고 수요는 증가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00 광역시의 경우 대기업과 공공기업이 많아서 더더욱 이 지원금은 인기가 좋다.
내가 브런치를 시작하면서 약속한 것이 일주일에 두 개의 글을 올리자였다. 그런데 그 약속을 지킬 수 없을 것 같다.
오전 9시 이후 3개의 지원금과 관련된 문의들이 전화를 타고 오고 신청서를 직접 들고 온 민원인을 통해 오기도 한다. 신청서를 출력해 조건이 되나 생각해보려 하면 전화벨이 울린다. 각 지원금의 지급요건들은 조금씩 헛갈리기 시작한다. 다시 법령을 보고 지침서를 보고 이러다 보면 퇴근할 때가 다가온다. 신청서를 처리해야 하는 것은 퇴근 이후에 해야 한다. 방금 전에 내가 뭐 했는지도 헛갈리기 시작했다.
민원인 분이 "전화가 와 있어서 전화를 드렸어요, 뭣 때문에 전화하신 거예요?"라고 하셨다.
내가 물었다. "제가 뭣 때문에 전화했을까요?"
민원인이 말했다. "그게 저도 궁금해요"
내가 3개 중 어떤 지원금으로 전화를 했었는지 기억이 안 났다. 책상 위에 뭔가의 내용과 전화번호들을 가득 써놓은 형광색 포스트잇들도 어이없어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지금은 이 일을 한 지 5일째다.
어제 하루 100건 가까이 신청서가 들어왔다. 오늘 난 4개를 처리했다.
마블 영화 중에 닥터 스트레인지를 좋아한다. 닥터 스트레인지는 영화 후반, 악의 끝판왕인 도르마무와 싸우게 된다. 우주적 존재인 도르마무를 한 낱 마법사가 이길 수 없는 법, 난 너무 궁금했다. 도대체 어떤 전략으로 닥터는 싸울까. 결론은 간단했다. 신적 존재인 도르마무를 지루하게 만드는 것이다. 본인을 무한반복 죽이게 함으로써 '죽임' 그 자체를 지루하게 만들어서 떠나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나는 고용노동부가 도르마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케이크를 줄 땐 예쁘게 봐 보려고 했는데 이번엔 도저히 좋게 봐줄 수가 없었다. 끊임없이 나를 죽이는 존재. 일어서려면 죽이고 일어서려면 죽이고.
우울해졌다.
하지만 갑자기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나는 도르마무 같은 고용노동부에게 깨진다. 도르마무는 내가 상대하기 너무 큰 우주적 존재.
나도 닥터 스트레인지처럼 해야겠다. 도르마무에게 아침마다 거래를 하러 가겠다. 밤이 되면 죽겠지만 다시 아침이 온다. 그게 마블의 타임루프 아닌가. 시간에 갇히는 거. 내가 고용노동부를 시간에 가둔 것이다. 역발상이다.
도르마무와 거래하러 가겠다. 매일 아침. 기다려라.
그래 어차피 고용노동부는 나를 죽이고 죽여도 아침은 온다. 먼저 지루해지는 사람이 지는 게임이다.
도르마무와 거래하러 간다. 생각해보니 재미난 일이다. 시간에 갇힌 우주적 존재와 나약한 인간. 누가 먼저 지루해질까. 뭐든 가진 게 많은 사람이 먼저 지루해지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