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지원팀에 온 첫날, 팀장님이 내 업무를 배정해주시고 업무를 가르쳐주실 사수를 정해주셨다. 내 업무란 쉽게 말해서 기업이 청년을 채용했을 때 주는 지원금과 기업이 일이 없어 휴직과 휴업을 했을 경우 지원해주는 지원금을 심사해서 지급하는 것이었다.
세부적 조건이야 있지만 여긴 지원금 사업을 홍보하는 곳이 아니니깐 일단 생략하겠다. 첫날 사수님이 두꺼운 책 4권을 주셨다. 사업주 지원 고용장려금 시행지침과 그 비슷한 용어들이 들어간 책들이었다. 이튿날 다른 사수님이 깔끔 명료하게 업무 교육을 4시간 정도 해 주셨다. 같이 사는 지방직 공무원(남편)은 "국가직 공무원은 아주 상식적으로 일을 배우네, 우리는 바로 현장 투입인데"라고 말했다. 나도 답하기를 "그래 우린 국가직 공무원이라규 다르지 달라"라고 했다.
셋째 날 팀장님이 한 사업장의 지원금 신청 서류를 주셨다. '그래 한 개부터 시작하는 거야, 천천히 일을 배우는 거야'라고 속으로 말했다. 이내 들려오는 팀장님의 말씀이 이어졌다. "이제 ㅇㅇ 지역 청년추가고용장려금은
ㅇㅇ씨한테 주면 됩니다. 그리고 고용유지지원금 업무도 같이 하면 됩니다"
고용보험시스템에 들어가 보니 이미 여러 건의 지원금 서류가 온라인으로 신청돼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살면서 최고로 잘 못하는 영역이 서류와 돈 계산이었다. 이 영역과 친해지려 해도 좀처럼 쉽지가 않아서 서류맨인 남편이 집안의 모든 서류를 관리하고 있었다. 종이(?) 서류인 집 서류, 세금 서류 이런 것들은 혼돈의 대상 그 자체였다.
돈 계산이라... 이것도 약간의 에피소드를 말하자면 예전에 콜센터 다닐 때 9명 정도의 팀원들과 무한으로 나오는 갈빗집에 가서 밥을 먹고 1/n을 한 적이 있었다. 팀원들은 나에게 2만 원을 선지급했다. 그리고 계산하고 남은 돈을 나눠달라고 했다. 결국계산을 못해서 팀원의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난 남편에게 용돈을 받고 살고 있다.
문과 출신이라 숫자랑 안 친해서 그런 거라고 나를 위로하고 다른 이에게도 설명하고 설득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지. 내가 해야 하는 일이 서류를 보고 돈을 지급하는 것이었다.
한 개의 지원금에 대해 2일 동안 업무를 하고 설 연휴가 시작됐다. 설 연휴가 끝난 후 또 다른 지원금을 하루 배웠다. 그리고 일주일 지나서 세 번째 지원금을 배웠다. 꿈에서 처리기한이 다 되어가는 사업장의 서류들이 나를 잡아먹고 괴롭혔다. 주말에 나와 업무를 했다. 한 사업장의 서류를 처리하는 데 6시간 정도 걸렸다. 그런데 그 다음날 사수에게 보여줬더니
다~~ 틀렸었다. 그래서 다시 다 ~~ 고쳤다.
손에 잘 익지 않았던 계산기는 계속 다른 숫자들이 눌러지고 곱하기를 더하기로 더하기를 곱하기로 누르는 바람에 지원금 액수는 신나게 틀려가며 삐딱선을 타고 있었다. 아주 훅을 제대로 날려버리고 싶었는지 엑셀이라는 놈도 등장했다.
너네가 엑셀을 알아???
음... 나는 모른다. 진정 몰랐다. 엑셀을 쓸 일이 없었다. 무려 42년 동안.
엑셀과의 대전쟁의 막이 오른다. 그놈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당하게 싸움을 걸어왔다.
옆 주무관님이 말했다. "엑셀을 좀 할 줄 알아요?"
내가 말했다. "전혀 할 줄 모르는데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옆 주무관님이 말했다. "고용유지지원금은 엑셀을 할 줄 알아야 하는데, 뭐 쉬워요. 금방 하실 거예요"
바로 사수님이 엑셀 서식을 하나 보내주셨고 지원금 내역을 계산해야 했다. 보내주신 서식은 근로자 한 명만 이름을 넣을 수 있었다.
내가 말했다. "저 주무관님, 칸을 하나 늘리고 싶은데 어떻게 하나요?" 생각해보니 참 당찬 물음이었다.
옆 주무관님이 말했다. "와 정말 엑셀을 하나도 모르시는구나!" 놀라워하셨다.
"자 마우스 왼쪽을 누르고 삽입을 누르면 칸이 하나 생겨요"라고 알려주셨다.
이틀 동안 출근해서 아침에 인사했을 때 눈 마주친 모든 주무관님들에게 9시부터 6시까지 물었다. 그리고 주말엔 늘 그렇듯 내 인생 최고의 선생님인 유튜브 동영상을 보며 엑셀과 싸웠다. 내가 내린 결론은 엑셀과 한글은 다르다 그리고 엑셀은 명령어를 외워야 한다이다. 그래 간단한 이치였다. 난 깨우쳤다.
나는 2주 정도 밀려오는 후회감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냥 콜센터를 잘 다닐 걸, 무슨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이 나이에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결국 나는 서류와 돈 계산과 엑셀이라는 놈한테 패배하는 건가. 다들 그렇겠지만 그러기가 싫었다. 그럴 수가 없었다. 니가 뭔데라는 오기와 함께 나는 나만의 기술을 다졌고 지금은 어느 정도 무승부(?)까지는 가고 있는 중이다. 심지어 요즘엔 일로 만난 이 두 녀석들에게 호기심도 생겼다. 좀 친해져 보니 꽤 깔끔하고 뒤끝 없는 애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