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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을 커밍아웃하다.

<김주무관의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

by 은반지

나는 가난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우리 집은 산골마을에 위치한 작은 구멍가게였다. 아빠는 초등학교 4학년 때 폐암으로 돌아가시고 엄마는 한 손이 불편한 장애인이었다. 외할머니는 막내딸이었던 엄마가 장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본인 곁에 머물게 하셨다. 그래서 아빠는 데릴사위가 됐으며 젊은 시절 연탄공장에서 일했던 이력이 결국 폐암을 만들어내 어린 딸 넷을 두고 먼저 하늘나라에 가셨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소위 '고모'라는 분들이 와서 '이 집 여자들이 우리 동생 등골 다 빼먹고 죽였다'며 '동생이 번 돈 다 가져가겠다'며 온 집안을 뒤졌고 정말 한 푼도 안 나오자 인연을 끊으셨다.


70대의 외할머니와 40대의 장애여성과 10대 이하 딸 넷이 사는 집은 조상이 물려준 재산이 없는 한 가난은 필연이었다. 우리나라는 산업화 시대를 겪으면서 전례가 없는 경제의 호시절을 겪고 있었다는데 나는 연필이 없었다. 지금은 7080 역사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모나미 볼펜 몸통에 4센티 정도 남은 몽당연필을 꽂은 게 문구의 전부였다.


초등학교 시절 , 아침을 먹지 못했다. 점심 도시락을 싸가지 못했다. 그래서 한 번은 초등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중간에 친구와 함께 조퇴를 시켜주신 적도 있다. 집에 가서 밥 먹으라고.

다행히 4학년 즈음되자 내가 도시락을 싸 갈 수 있었다. 김치와 밥뿐이었지만 오후 수업시간에 배가 고파서 얼굴이 창백해지는 일은 없었다.


중학교 때 동네 산에 나무들을 다 베어내는 큰 공사가 생기면서 외부 인력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동네에 유일한 구멍가게였던 우리 집은 라면을 끓여주는 함바식당 비슷한 것을 했고 잠시 배고프지 않은 시절이 있었다.


고등학교 때 우리 동네는 도시개발에서 제외됐는지 파리도 날리지 않는 버려진 폐촌이 되었다. 그런데 나는 엄마 말을 빌리자면 무슨 귀신이 들었는지 뜬금없이 고속버스를 타고 한 시간이나 걸리는 사립고등학교를 들어갔다. 기숙사에 살아야 했고 학비는 비쌌다. 하지만 학교가 기독교 학교라 장학금이 후했다.


집이 얼마큼 가난한지 철철 눈물 나게 보고서를 쓴 학생들 중에 성적순으로 전액 장학금을 줬다. 지금 생각해보면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인권침해였지만 가난했기에, 학교를 다녀야 했기에,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눈물샘을 자극하는 단어들로 종이들을 채웠다.


그나마 학우들에게 비밀보장이 된다기에 부담 없이 솔직하게 썼다. 그런데 담임 선생님이 종례시간에 어제 '불우학생 장학금' 보고서 쓴 사람은 지금 제출하라고 했다. 하필 그때 맨 뒷자리에 있었던 나는 너무나도 길었던 친구들의 책상 사이를 걸어서 선생님께 드렸다. 나 혼자였다.

선생님이 그러셨다.

"많이도 썼네, 수고했다"


그 장면은 20년이 넘었지만 컬러사진처럼 선명하다. 선생님의 표정과 말투와 친구들의 눈빛과 그날의 온도와 그 오후 시간대의 공기의 밀도감까지도.


알겠지만 90년대 후반의 사립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학비만 해결된다고 학교를 다닐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기숙사는 3달 정도 살다가 도저히 기숙사비를 낼 수 없어 친구의 자취방에 얹혀살았고 보충수업 교재는 친구들에게 돌아가며 빌렸고 친구가 다 풀고 버린 문제집을 지우개로 지워서 다시 문제를 푸는 방식으로 공부했다.


그럼 밥은 어떻게 해결했을까?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공부를 빡시게 시켰었다. 아침 7시에 가서 0교시를 했고 8시에 예배를 드렸고 8시 40분에 1교시가 시작됐다. 그리고 밤 12시까지 자율학습이었다. 아침은 굶었고 점심과 저녁은 친구 밥을 나눠먹었다. 그 친구의 엄마가 내 소식을 듣고 안타깝다며 친구 도시락을 1.5배 정도의 양을 싸서 보내주셨다. 나는 숟가락, 젓가락만 가져갔다.


대학 입학금은 마을 이장님이 도와주셔서 마련할 수 있었다. 내 가난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기에 또 대학 4년은 어떻게 보냈을까.


20살 이후로는 내가 일해서 돈을 벌 수 있었다. 이게 나한테는 큰 위로였다. 입학하자마자 각종 아르바이트를 섭렵했다. 서울 지리를 전혀 모름에도 퀵서비스 알바를 했다. 퀵 서비스인데 나는 배당받은 물건을 오전 9시에 받아서 오후 5시에 가져다줬다. 하루 만에 짤렸다.


당시 컴맹인데 pc방 알바도 했다. 당연히 한 달도 안돼 짤렸다. 김밥집 알바, 초등학원 알바, 각종 패밀리 레스토랑 알바, 커피숍 알바. 빵집 알바, 치킨 집 알바. 화장품 방문판매 알바, 설문지 알바 등등


대학 2학년 때, 학교는 학보사 기자들에게 봉사 장학금을 지급했다. 신문을 이주일에 한 번씩 발행하는 것에 대한 대가였다. 기사를 써내느라 주 4일은 밤을 새웠다. 그래서 커피숍 알바 하나만 했다.


대학교 때도 항상 밥이 문제였다. 그렇게 알바를 했는데 학비를 내고 교통비를 내면 밥 먹을 돈이 없었다. 동기가 사주고 선배가 사주고 후배가 사주고 졸업을 한 선배가 사주고 그런 식으로 타인의 도움으로 배는 굶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월급쟁이 기자가 됐을 때도 가난은 이어졌다. 가난과 함께 잘 버티고 버티며 20여 년을 살았는데 정말이지 그때는 징글징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난을 끝내고 싶었다.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았던 나의 가난의 역사는 26살에 끝이 났다.

겨울에 '내 돈'으로 만원 어치의 딸기를 사고 옥탑방으로 가는 길에 내 가난이 끝났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말하는 것을 좋아했고 가르치는 것을 좋아했던 나는 얼떨결에 강남 사교육 시장 한복판에 있었고 큰돈을 벌 수 있었다. 그 일은 새벽 7시에 시작해서 다음 날 새벽 2시에 끝이 나는 일이었다.

3년 정도 큰돈(내 기준으로 ㅎ)을 벌고 결혼을 하면서 그 시장을 떠났다. 서울도 떠났다.


지방직 공무원인 남편은 지금도 '그때 당신 정말 많이 벌었는데, 그 일을 계속했어야 했는데 말이야' 하면서 진심으로 아쉬워한다. 하지만 그 일은 내 가난의 역사를 끊어주는 역할만 할 뿐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돈을 벌기 위해 참치잡이 원양어선을 타는 것처럼 나에겐 그 일이 그런 것이었다.


그렇기에 큰돈을 벌었지만 나는 남편의 아쉬움과는 다르게 미련 없이 나올 수가 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나는 한 번도 내 가난을 인정한 적이 없었다. 그냥 나는 마음속으로 늘 '난 가난한 아이가 아니다'라고 세뇌했다. 친구와 마을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았지만 나 스스로 '가난'하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그 단어를 말해야만 하는 상항이라도 그 단어를 피해서 말했다. 비슷한 다른 말로 대체했다. 그게 뭐라고 '가난'을 커밍아웃하기 힘들었다. 세상이 인정하더라도 '나'라도 인정하지 않아야만 '가난'은 내 것이 아닌 것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고집을 부렸다


하지만 난 20년이 지나서 내 '가난함'을 커밍아웃하기로 했다. 그것도 나였기에 부정하면 그 시절 내가 없어진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나이가 드니 한 순간 한 순간이 소중해졌다. 가난한 나의 10대와 20대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가난함'이 약이 되고 밥이 돼서 지금 나는 건강한 나무가 됐고 그 나무 밑에서 내 아이들이 쉴 수 있기 때문이다.


가끔씩 아이들이 물어본다. 한참 모든 것을 먹어치우는 남자아이들이라 음식에 관심이 많아서인지 음식에 관한 질문이 많다.

"엄마는 언제 감자탕을 먹어봤어"

나는 말한다.

"20살에"

아이들이 말한다

"어? 왜 그렇게 늦게 먹은 거야? 그 전엔 감자탕을 싫어했어?"

나는 말한다.

"그 전엔 감자탕이라는 음식을 본 적이 없었고 본 이후에도 돈이 없어서 못 사 먹었어."

아이들이 물었다.

"엄마 가난했어?"

나는 이제 당당하게 말한다.

"많이 가난했어. 정말 많이 가난했었지."

그리고 나의 가난의 역사를 들려준다.


<가난했었던 김 주무관은 이제야 나에게 잠 잘 방을 빌려주고 밥을 빌려주고 책을 빌려줬던 친구들을 찾아보려 하지만 찾을 길이 없어 오늘 이 글을 본 옛 은인들이 댓글을 달아주기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모든 친구와 선배와 마을 사람들에게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외쳐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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