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다닐 때 압구정에 있는 대형 커피 프랜차이즈에서 오픈 알바를 한 적이 있었다. 사장님은 30대 젊은 여자였고 굉장히 성실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30대에 서울 압구정 한 복판에 커피숍을 소유하고 있다니 엄청난 금수저라며 부러워했겠지만, 21살 그때 나는 그게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내 관심은 지각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아침 7시에 도착해야 하는데 난 항상 전날 학교에서 대학 신문에 실을 기사를 쓰느라 밤을 새웠다. 잔다 해도 한두 시간 기자실 소파에 눈을 감고 누웠다 일어나는 게 전부였다.
카페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다음 우유에 휘핑크림 조금, 설탕 조금을 넣고 거품기를 이용해 생크림을 만드는 일을 했다. 내가 만든 생크림은 느끼하지도 않고 많이 달지도 않는 것이 아주 깔끔한 맛으로 유명(?)했다. 매니저님이 시키는 대로만 했는데 내가 만든 생크림은 인기가 좋았다. 생크림 만드는 게 간단한 것 같아도 사장님의 일주일 특강을 통해 얻어진 결과물이었다.
가게에 새벽부터 도착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신선한 우유의 향을 맡으면 내가 졸렸다는 사실도 잊어버렸다. 생크림을 잘 만들자 사장님이 이젠 샌드위치를 만들어보자면서 일주일 동안 기술을 전수해주셨다. 샌드위치는 가게 옆 빵집에서 막 구워 온 빵으로 만들었다. 막 구운 빵의 아름다운 향기도 내 졸음을 연기처럼 날려버렸다.
빵의 따뜻함이 어느 정도일 때 햄을 올려야 할지 야채를 올려야 할지 천천히 알려주셨다. 빵이 너무 뜨거워도 너무 차가워도 본연의 맛을 낼 수 없다고 하셨다. 햄은 어느 크기일 때 가장 맛이 좋은 지, 채소는 어느 정도의 양이 들어가야 하고 모양은 어때야 하는지 세심하게 가르쳐주셨다.
젊은 사장님은 "커피숍이니 커피 맛도 정말 중요하지만 우리 가게는 샌드위치가 유명하기 때문에 이 맛이 나를 통해서 손님들에게 제대로 전달되기 원한다"라고 늘 말씀하셨다. 사장님은 샌드위치를 아기 다루듯 하셨다. 나는 사장님의 가르침대로 샌드위치도 소중하게 만들었다. 샌드위치도 평이 좋았다. 그러자 사장님은 "00 씨가 생크림과 샌드위치를 정말 맛있게 만들어줘서 마음이 든든하다"며 진심으로 "고맙다"라고 하셨었다.
오전 10시 즈음. 출근길 커피와 샌드위치를 찾던 회사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가게에 나른한 공기들이 따뜻하게 퍼지기 시작해지면, 젊은 사장님은 길 건너 큰 햄버거 집에서 치즈버거를 직원수만큼 사서 두 손 가득 들고 오셨다. "자기가 만든 음식만 먹으면 모든 샌드위치가 맛이 없어져요. 그러니깐 우리는 되도록 남이 만든 햄버거를 먹으면서 우리의 맛있는 샌드위치 맛을 기억하자고요"라면서 햄버거를 매니저분께 전달하고 휙 하고 사라지셨다.
나는 그냥 오전에 4시간 일하고 지각도 좀 하는 성실하지 못한 알바생이었다. 그런데 나를 믿고 나에게 중요한 기술과 비법을 알려주시면서 내가 가게에 정식으로 소속되기를 원하셨다. 아마 소속감이 있으면 책임감도 더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던 것 같다.
(물론 당시 김주무관은 보장된 정규직 인지도 모르고 생크림과 샌드위치엔 관심이 없고 온통 기사 쓰는 것만 관심 있었던 열혈 학생기자인지라 젊은 사장님의 말씀을 왼쪽 귀로 듣고 오른쪽 귀로 흘려버렸다. ㅎ)
그래서일까. 내가 했던 숱한 아르바이트 중에 아직도 길거리를 걷다 고소한 커피 향과 버터향 가득한 빵 향기를 맡게 되면 가슴속 어딘가에서부터 봄날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나의 젊은 사장님이시다.
아쉽게도 체력의 한계에 부딪힌 나는 결국 알바를 그만뒀고 그 당시 처음으로 주휴까지 정산된 월급을 받아봤다. 주휴수당을 몰랐던 나는 일주일에 6일 일했는데 7일 치 수당을 주기에 신기해서 물어봤더니 매니저분이 주휴수당을 준거라고 말했는데 그땐 그 말을 이해 못하고 여하튼 뭐라도 더 주니 기분이 좋았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오늘, 김주무관은 짧은 만남이었지만 좋은 사람이었던, 사람에 대한 멋진 인상을 남겨주었던 젊은 사장님에게 감사해본다.